말씀을 읽다 문득 왜 동방의 박사들이 주의 나심을 경배하러 왔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 (2절)’를 찾았는데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났던 인물들은 수 없이 많지만 유독 헤롯 당시 나타난 별을 보고 ‘유대인의 왕’의 탄생을 짐작해 내었다. 그런데 4-6절은 그저 또 하나의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이번은 ‘그리스도’ 혹은 ‘메시야’의 탄생을 말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 이전의 그 어느 이스라엘 왕에 대한 탄생도 동방에서 박사들이 왔다는 기록은 적어도 성경에서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방 박사들은 정치를 모른다. 이들은 별의 위치를 (아마도 당시 점성술로?) 계산해서 이스라엘로 왔지만, 수도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에 대해 묻는다. 아무래도 왕은 왕궁이 있는 도성에서 태어났을 거라는 지극히 ‘박사’다운 이성적인 짐작으로 그들은 행동했다. 그래서 오히려 헤롯 왕이 그들이 갈 곳은 베들레헴이라고 가르쳐 준다 (8절). 생각해 보면 이들은 영적인 인물들이기 보다는 이성적인 사람들이었고, 순수한 마음으로 온 역사를 통해 가장 위대하신 인물의 탄생은 계산해 낼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당시 정치적 상황은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로 인해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했고 (3절) 후에 이는 많은 유아들의 학살을 야기한다.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항상 생각했던 ‘세 박사’도 아닌 것 같다. 본문은 ‘박사들’이라고 복수로 말하지 세 명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당시 여행은 위험한 것이었고, 특히 황금 유향 몰약 등 값진 것을 지니고 여행하는 것이라면 아마도 큰 여행단을 꾸몄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당시 선진이었던 동방으로 부터 온 그들의 여행단의 규모는 예루살렘에게 큰 관심을 끌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이 박사들의 모습은 주님을 처음 만난 그리스도인들의 어떠함을 보여주는 듯 하다. 주님 만난 것을 기쁘고 기쁘게 여기지만 동시에 성숙하지 않아서 인간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먼저 한다. 그래서 열심은 있지만 지식에 따른, 말씀에 따른 행동을 하지 않아서 결론적으로는 많은 큰 문제를 가져온다.
반면에 헤롯의 모습은 하나님의 택하신 유대 백성, 그리고 그 백성의 정치적 왕의 위치에 있지만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급급해서 역사를 통해 기다려온 메시야의 오심 조차도 방해하려는 모습이다. 오늘 많은 기독교인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본다. 몇몇 목회자들의 어처구니 없는 일들에 대해 비판하고 정죄하지만 그들의 모습은 헤롯과 닮았고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나의 삶 속에서 나는 얼마나 그리스도께 드렸는가.. 얼마나 그를 섬겼는가… 성경에 대해 많이 배운다고 생각하지만, 말로만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고 하며 정작 내 마음과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왕궁에 모시기 보다는 마굿간만 내어 드렸다.. 그래도 내 마음의 마굿간에라도 주님은 불평하지 않으시고 내 삶 안으로 들어 오셨다...
주님, 고맙습니다. 정작 제가 내어드린 곳은 이제 보니 마굿간이었네요. 사실 주님 없는 내 삶 자체는 왕궁이 아니라 마굿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마굿간도 청소하고 치워서 왕궁으로 내어 드리기 원합니다. 왕이신 주님께서 계신 곳이 바로 왕궁임을 압니다. 나로 왕궁 삼으심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