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 요한이 등장한다. 전에는 ‘세례 요한’ 이라고 하다가 요즘에는 ‘침례 요한’ 혹은 ‘침례자 요한’ 이라고 번역을 많이 해 놓았다. 헬라어로는 ‘밥티스테스’로 그 말 자체는 ‘(물에) 잠그는 자’이다. 그래서 직역하면 ‘잠그는 자 요한’이다. 좀 부자연스럽지만 ‘세례’의 ‘씻다’라는 의미와 ‘예식’의 예를 쓰는 잘못된 번역에 비하면 더 나은 것이라 본다. 침례 역시 ‘예식’이라는 말이 추가 됐는데, 이는 종교적인 것을 좋아하는 우리 민족이 첨가한 말이다. 원래는 그냥 ‘잠그는 자 (침수자)’이다.
이 요한이 처음 외쳤던 말은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셨던 말씀과 동일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인데, 시간적으로는 주님보다 빠르다. 그래서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이다. 특이하게도 이 천국 복음의 예비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도성이 아니라 유대 광야에서 시작됐는데, 사람들의 일상에서 광야로 불러 내었다. 일상은 정상적인 것이지만 천국의 복음을 처음 듣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하고 일상에서 놓임이 필요하다.
그런데 요한이나 주님이나 처음으로 하신 말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는 선포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연 얼마나 이해했을까? 요즘 처럼 예수 믿고 죽어서 천당 가는 것으로 이해했을까? 주님께서는 요한 처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셨지만 나중에는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눅 11:20)’고 말씀한다. 주님께서 오심으로 그의 천국 ‘바실레이아’ 혹은 ‘킹덤’은 이미 임했다. 주께서 왕이시고 그 수하와 따르는 백성들이 왕국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바로 천국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왕국’인줄 알았지만 침례자 요한이나 주님께서는 '임박한 천국’이 따로 있고, 회개해야 볼 수 있고 들어갈 수 있음을 말씀한다. 천국은 하늘에 속한 것이기에 땅의 어떤 것을 초월한 것이고 그래서 땅의 시스템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기에 회개가 필요하며 땅에 속하지 않았지만 이 땅에 임할 (혹은 이미 임한) 하나님의 새로운 경륜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이미 율법이 있었고 구약의 경륜에 따라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이 천국 복음이 먼저 유대인들에게 선포된다. 즉 ‘천국’은 구약과는 다른 것임을 보여준다. 구약과 같은 것이었다면 이방인들에게만 전해지면 되는 것이다. 특히 당시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 대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한 것을 보면 당시 시스템을 뒤집어 엎는 선포였고 더우기 육적 ‘아브라함 자손’이라는 우월감을 완전히 발가벗긴다.
천국을 맞기 위해서는 ‘회개’함이 필요한데, 현재 우리에게 익숙한 모든 시스템들에 대한 회개가 필요하다. 물론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회개는 죄의 자복을 넘어서는 것이다. 생각이 바뀌는 것이다. '회개'의 헬라어는 '마타노에오'인데, '함께, 후에, 넘어'를 뜻하는 '메타'라는 단어와 '생각으로 인식하다 이해하다' 등의 뜻인 '노에오'의 합성어이다. ‘천국’의 모습만을 모방하려던 공산주의는 완전히 실패한 것으로 드러났고, 사회주의 역시 한계가 있으며, 자본주의 역시 천국 시스템은 아니다. 이러한 모든 것에서 우리는 회개해야 하고 예수만이 왕이신 천국 시스템을 배워야 한다. 천국이 임박했고, 이미 왔기 때문이다.
주님, 주님의 분명한 말씀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저는 삶 속에서 천국을 추구하지 않고, 대신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익숙한 시스템에 의지해서 살고 있습니다. 미국식 사고 방식과 합리성을 추구하고 사회 정의에 가치를 둘 때가 많습니다. 주님 오늘 나의 생각을 씻어 주시고 열매 맺지 못하는 어설픈 기독교인의 우월감을 접게 하소서. 내 마음 속에, 그리고 내 가정에 천국이 오시기를 소망합니다. 저를 다스려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