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산상수훈의 시작으로 주님께서는 ‘~은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신다. 원어로는 ‘행복하다’ 즉 해피하다는 뜻이다. 전에 불교신자와 기독교 신자의 행복도를 설문했는데 불교신자들이 훨씬 더 행복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 이유는 그 행복의 기준이 세상의 행복 즉 느낌과 감정에 연관된 것이었지 천국의 행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는 말씀을 시작으로 드디어 5장부터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그 시작이 ‘행복’ 그리고 행복의 정의이다.
그 내용을 보면 일반적 기준으로는 절대 행복한 것이 아니다. 그 첫째가 ‘영에 가난한 이들은 행복(하다).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로 시작하는데, ‘영’이 ‘가난’한 것이 행복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이유는 바로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즉 천국을 말씀하고 계시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소위 팔복은 전혀 우리가 알고 있는 행복에 대한 말씀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영이 가난하니? 사실 그게 행복이야’ 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이것이 바로 회개함으로, 생각을 바꿈으로 알게 되는 천국의 행복이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첫째 행복인 ‘영에 가난한 이들’에게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 현재형 이지만, 그 뒤에 나오는 행복은 모두 그 약속이 미래로 되어 있다가 12절 ‘하늘에서 상이 크다’만 다시 현재형으로 나온다.
그래서 이 ‘하늘 왕국’의 ‘행복’은 누구나 받고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리’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듯이, 또 13절부터 ‘너희는 세상의 소금’ 그리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정체성을 부여받은 이들에게 가능한 말씀이다. 믿는 사람들이 세상의 행복을 추구한다면 실패할 것이다. 성경은 특히 천국 복음에 있어서 그러한 세상 복을 약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어떤 행복을 추구하는가? ‘예수 믿는 사람이 이렇게 행복한 기분이 안들어도 되나?’라는 질문은 이제 접어도 될 것 같다. 오히려 내가 가난함 중에 있고, 우는 중에 있고, 우유부단함 점이 있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긍휼이 넘치고, 마음이 깨끗하고, 화평케 하고, 의를 위해 핍박 받아오는 중이고, 주님 때문에 여러 곤란한 일을 겪는 것 즉 세상적으로는 손해 보고 스트레스 받는 가운데 있는 것이 천국 백성으로 또한 주님의 제자로서 사실 행복한 것임을 말씀한다.
주님, 제가 즐기고 싶어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것들에서 느끼는 행복감이 제가 추구할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행복을 누리는 것, 영원한 상을 바라보는 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사실 이것이 진정한 행복임을 배웁니다. 주님을 섬기는데서 오는 모든 실패와 어려움과 관계 속에서 부딪히는 문제 등 여러 도전들에 대해 짜증을 내거나 힘들어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이러한 것들이 행복임을 깊이 알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