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절에 주님께서는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불가능하게 들린다.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어떻게 인간이 온전해질 수 있나? ‘온전’이라는 말은 ‘텔레이오스’라는 단어인데 ‘결말에 이르다, 완전하다, 장성하다, 성숙하다’ 등의 뜻이 있다. 그런데 시제가 중요하다. ‘하나님의 온전하심’은 현재지만, ‘너희도 온전하라’는 미래형이다. 즉 ‘너희도 앞으로 온전하게 되어라’이다. 이것은 같은 단어를 쓴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를 보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즉 38절에서 47절까지의 말씀은 현재는 불가능하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원하신 생명을 얻어 하늘의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심이 분명해질 때, 하나님의 자녀들이 지양해야 하는 그리고 할 수 있는 온전함이 된다.
38절의 우리 말 번역은 좀 마음에 들지 않는데,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가 아니라 ‘하나의 눈에 하나의 눈으로, 하나의 이에 하나의 이로’가 맞다. 마치 눈을 잃으면 눈 대신 다른 것을 상하게 하지 말아라 혹은 눈 하나를 잃게 되면 가해자의 두 눈 모두를 뽑아도 되고, 이 하나를 잃게 되면 이를 몽땅 뽑아도 된다는 것처럼 한국어 성경은 이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눈 하나에 눈 하나 혹은 이 하나에 같이 이 하나’라는 말은 당연한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 피해자 입장에서는 이 하나를 잃으면 가해자 이는 모두 뽑아 버려야 속이 풀릴 것 같은 죄성이 인간에게는 있다.
주님은 오히려 이러한 기본적인 ‘공평의 원칙’ 보다는 죄성을 뛰어 넘는 온전함이야말로 천국임을 말씀하신다. 즉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것은 누가 오른 편 뺨을 치거든 왼편까지 돌려 대는 것임을 말씀 하신다. 잘 생각해보면 보통 오른손잡이가 뺨을 치면 왼편 뺨인데, 오른 편 뺨을 맞았다는 것은 상대가 왼손잡이 이거나 아니면 손등으로 쳤다는 얘기가 된다. 뺨 맞는 것은 정말 수치스러운 일인데 거기다 손등으로 맞게 되면 그 분개함은 이루 말할 수 없어서 큰 싸움 혹은 살인까지 야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주님은 참는 것을 넘어 왼쪽도 돌려 대주라는 말씀을 하신다. 이것이 바로 천국이고 하나님의 온전하심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이해를 넘어서는,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기준이다.
계속해서 기본을 넘는 하나님 자녀의 행동 기준을 말씀하는데, 이러한 성숙함이 바로 믿는 이들로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케 한다 (45절).
주님 이 말씀을 의지하여 참았을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정작 속 마음은 분개하고 슬프고 아팠습니다. 또 입으로 불평했습니다. 주님의 생명 또 그 성숙케 됨은 그런 것이 아님을 압니다. 나의 힘으로 하려던 모든 것, 그래서 사실은 실패한 과거 경험들에 대해 이제는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지혜를 주소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할 때 오히려 기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이 오늘 삶의 목표가 되게 하시고 주의 생명 안에서 그 성숙함을 바라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