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시작하는 오늘 본문은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 비판이 가능한가를 생각하게 한다. 사실 비판의 문제에 있어서, 크리스천은 건강한 비판을 할 줄 알아야 한다. 고전 2:15에는 ‘신령한 (영적인)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에서 ‘판단’은 오늘 말씀의 ‘비판’과 거의 같은 말이다. ‘비판’은 ‘크리노’라는 단어로 ‘나누다, 뽑다, 선택하다, 인정하다, 선호하다, 결정하다, 심판하다, 선악간에 의견을 내다, 다스리다, 분쟁하다’ 등의 많은 뜻이 있다. ‘판단’은 거기에 ‘아나’라는 접두사를 붙여 ‘아나크리노’라는 단어인데, ‘살피다, 심판하다, 가늠하다’ 등의 뜻이 있다. ‘아나’라는 접두사는 ‘중간에’ 라는 뜻인데 ‘크리노’가 여러가지 것들에 대해 각자의 소견대로 비판하는 것이라면 ‘아나크리노’는 어떤 기준을 두고 판단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하지만 주님께서 이 부분을 통해 말씀하는 것은 ‘신령한 자’에 관한 것이 아니라 ‘외식하는 자’ 즉 ‘위선자, (휘포크리타)’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1-2절은 복수 명령형인데, 3-5절은 단수 명령형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즉 이 말씀을 당시에 들었던 제자들이나 성경을 통해 읽는 자는 눈에 티끌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들보가 있는 사람임을 ‘개인적’으로 깨우쳐 주신다. 그래서 비판할 자격이 없다. 천국은 이것을 깨달은 사람들이다.
7-8절은 능동태와 수동태, 시제 그리고 단어들이 섞여 있어서 다시 번역해 보았다. “요구하고 있으라 그러면 너희들에게 주어질 것이다. 추구하고 있으라 그러면 발견할 것이다. 문을 두드리고 있으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리게 될 것이다. 요구하고 있는 모든 이가 얻고 있고 추구하고 있는 이가 발견하고 있고 문을 두드리고 있는 이에게 열리게 될 것이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우리들에게 좋은 것으로 주신다고 말씀하는데, 하나님 아버지께 항상 구함으로 우리는 얻게 되고 동시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는 막 11:24 말씀처럼 구하는 것 자체가 얻고 있다는 증거다.
그런데 결국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요구할 수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계시기에 가능한 것이고, 추구하는 대상 (찾는 것) 역시 하나님 자신이고 하나님의 어떠하심이며, 문을 열어주시는 것 역시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이 주시는 ‘좋은 것’은 눅 11:13에 ‘성령’이심을 밝히신다. 이러한 하나님이 계시고 성령을 주시기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사람들이 너희들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뗄레테, 의도하다 생각하다 결정하다 바라다 사랑하다 등)들을 너희도 그들에게 하여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이기 때문이다 (12절)”의 말씀이 가능해진다. 이것이 천국이다.
주님, 내 눈에 들보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만약 티끌이라 해도 다른 이들에게는 들보로 보일 것을 압니다. 또한 나도 그들에 대해 마찬가지 입니다. 내가 다른 이들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그것을 먼저 그들에게 능동적으로 하는 하루 되게 하소서. 주님 자신을, 성령을 당당히 요구하고, 추구하며, 결국 그 앞에서 문이 열릴 때까지 두드리는 주의 자녀들 되게 하소서.
내 눈에 들보 있으니 타인 눈 티끌 비판하랴
내 들보 먼저 치운 후 주의 영 따라 판단하리
내 눈의 위선 벗어야 주님 구할 수 있으니
당당히 그 어떠하심 요구하고 또 추구하며
문이 내게 열릴 때까지 두드리고 또 두드리네
주시는 이 하나님이니 그는 믿을만 하구나
그 공급하시는 힘으로 나 먼저 섬기리 먼저 하리
그 공급하시는 영으로 나 먼저 주리 먼저 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