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에도 역시 병고치는 사건이 등장하는데, 나병환자를 고치셨던 방법과 같이 베드로 장모의 손을 '만지심'으로 열병을 고치신다.  열병 자체는 나병이나 중풍병 처럼 큰 병은 아닐지라도 병으로 묶여 있음으로 누워있는 자체는 아무런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죄라는 것도 큰 죄 작은 죄로 구분할 수 있을지 몰라도 죄 자체는 우리가 죄인이며 죄인이기에 그 열매로 죄를 짓는 것임을 보여주고, 그러기에 작은 죄라도 결국은 사망에 이르게 함을 밝힌다.

재미있는 것은 8장에서 시제가 과거형, 현재형, 현재 진행형, 미래형 등 많이 나오지만 계속해서 아오리스트 시제가 등장한다.  특히 병고치는 사건에서는 계속 아오리스트다.  즉 이 병고치는 사건들은 주님이 단지 과거에만 행하셨던 사건이 아니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현재 진행형으로 받아 들이게 한다.  굳이 15절을 아오리스트 식으로 번역한다면 “그녀의 손을 만지시다 그러니 그녀의 열병이 떠나가다 그리고 여인이 일어남을 받다 그리고 예수께 (하던대로, imperfect 시제) 수종들(었)다”고 번역할 수 있다.  주님의 치유는 과거 2천 년전 사건이 아니라 오늘 말씀을 읽는 사람들에게도 아오리스트로 동일하게 임한다.  그리고 병에서 놓임을 받은 이들은 그들이 원래 하던대로, 즉 원래 기능을 발휘해 오던대로 섬길 수 있게 된다.  

16절 역시 아오리스트 시제를 쓰는데 여기서는 주님께서 말씀으로 ‘영들, 프뉴마타’를 쫓아 내시고 병자들을 모두 고치신다.  그런데 17절에는 이상한 말이 나온다.  이사야의 예언을 들어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고 하는데, 주님의 치유 사역은 그냥 만지시고 말씀하심으로 병이 나은 것 아니었나?  귀신(다이몬)에게 나가라고 하니 나간 것 아니었나?  하지만 말씀을 잘 읽어보면 그냥 병이 없어진 것이라기 보다는 주님이 대신 우리의 연약함과 병을 가져간 것으로 이해가 된다.  양의사들은 잘 모르겠지만 한의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환자를 고칠  때 그의 병을 자기에게 한번 들어 오게 하고 그 후에 자신의 몸에서 나가는 식으로 병을 치유할 때가 많다고 한다.  어디까지 믿을만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의사는 병자의 연약함을 함께 짊어질 수 있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그러한 의사는 오늘 주님의 몸된 교회다.  하나님의 영이 또 주님의 말씀이 분명 치유를 가져오지만, 또 병원에 가서도 병을 고칠 수 있게 도움을 받지만, 사람의 약함과 병을 나눌 수 있는 곳은 바로 주님의 몸된 교회이다.  그래서 약 5:14에는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고 말씀하는데, 장로들은 주의 이름 안에서 기름을 바르고 안수하며 기도한다.  이러한 행위는 장로들이 안수함으로 그 병을 나누어 짊어지는 자세를 말한다.  약한 이들에게 병이 임하면 병이 왕노릇하지만, 건강한 이들에게 나누어지면 사라진다.

주님께서 19절에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는 말씀에도 엿볼 수 있는데, ‘머리 둘 곳’은 ‘여우의 굴’이나 ‘새들의 거처’같이 어딘가 쉴만한 장소로 이해할 수 있지만,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으로 보아,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머리 되시는 주님께는 바로 교회가 ‘머리 둘 곳’임을 알 수 있다.  이 세상에 오직 주님께서 만족하시고 쉼을 얻을 수 있는 곳은 그의 몸이고, 그의 몸된 교회 역시 쉴만한 곳은 주님 당신 외에는 없다.

주님, 주님을 따르기 위해 우리가 죄의 권세에서 또 연약함에 놓이기 원합니다.  사실 이미 이루어졌고 또 믿는 이들에게 지금도 역사하심을 믿습니다.  오늘도 만져 주시고 말씀하시고, 우리 안에서 안식하시며 또 우리도 주님 안에서 안식하게 하옵소서.  여러 모양의 걱정과 근심을 주님께 가져갑니다.  형제 자매들의 병을 우리 가운데 짊어짐으로 주님의 치유가 이루어지는 놀라운 사건이 계속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