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말씀 후반부에 주님은 제자들로 아버지께 구하여 추수할 일꾼을 보내 달라고 기도하라고 명하셨다. 그런데 바로 오늘 말씀에 특별히 열 둘을 택하셔서 부르시고 권능을 주시고 또 보내셨다. 주님은 아버지와 하나시다. 그들을 ‘사도’라고 하셨는데 ‘보내심을 받았다’라는 말이다.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지만 세상적으로 보면 특출난 인물이 없다. 어부들과 그 형제들과 동네 사람들 그리고 친척, 또 세리에 마지막으로 ‘예수를 판 자’ 가룟출신 유다다.
개역의 5-6절이 몇 영어 번역본보다 원어에 충실하게 매우 잘 번역되어 있다. ‘이방인의 길’ ‘사마리아의 고을’ ‘이스라엘의 집’의 어린양들 (원어는 복수) 이라고 했는데, (넓은) 길에서 고을로, 고을에서 집으로 점진적으로 좁아진다. 여기에 ‘오히려’라는 단어를 썼는데, 주님께서 제자들을 처음 보내실 때 그들이 감당해야 하는 사역의 한계를 정해 주셨다. 그러면서도 주님께서는 16절에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라고 경계하신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가서 천국을 전파하고 권능을 행할 때 거저 주라고 말씀하시고, 더우기 여행비를 따로 준비하지도 말고 가는 곳에서 필요한 것을 해결하라고 말씀하신다. 결과적으로 제자들이 돌아와 기쁨으로 주님께 보고를 했다 (눅 10:19). 오늘 말씀에서 ‘주다’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오는데 1절과 8절이다. 1절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신 것이고, 8절은 그러한 권능을 거저 받았으니 사람들에게 거저 주라는 명령이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해진다. 과연 믿는 이들, 특히 사도들 같이 보냄을 받은 사람들은 항상 여행비도 없이 모든 것을 거저주며 세속적인 일은 부인하는 삶을 살아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사실 후에 눅 22:36에는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해석과 이해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 그리고 보호하는 검 등이 없이 사역할 때가 있는가 하면 그런 것들이 필요한 때도 있다.
사도행전 2장 후반부에 일어난 기적들, 특히 그 많은 사람들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 (44-45절)”던 놀라운 역사를 읽으며 오늘날은 왜 이렇게 하지 못할까..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는 걸까 하고 고민해 보았다. 물론 역사적으로 이러한 실행이 몇번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많은 경우 이단으로 빠지거나 건강한 공동체의 실행이라도 지속되지는 못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일까? 생각해 보면 사도행전 2장의 놀라운 공동체의 나누는 삶은 그 후 교회가 전역에서 나타나면서 지속되지는 못한다. 서신서에는 그러한 내용이 별로 나타나지 않고 다만 상황에 따라 필요에 의해서 서로 나눌 것을 나누었던 것을 본다.
그러고 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말씀은 당시 사도들에게 주어진 일시적인 명령인지 궁금해진다. 그런데 사실 그렇지 않다. 그 시제가 부정시제 (aorist)인 것도 그렇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권능이고 복음이며 영원하신 생명이고 자유함이다. 그 어느 것도 우리 자신에게서 온 것이 없다. 그러기에 그 가치는 한이 없고 우리가 값을 지불할 수 없어서 거저 받을 수 밖에 없는 귀하고 귀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당연히 거저 주어야 하는 것이 된다.
확실히 알겠네 나 확실히 알아
거저 받은 것 주께 속한 것
나로부터 온 것 하나 없으니
나 받은 것 거룩하고 영원하신 것
이제 내가 빚지고 거저 줘야 하는 것
주님, 거저 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거저 받았음을 확실히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권능과 생명을 금전적 이익이나 사람들의 인기를 구하는 도구로 사용하지 말게 하시고 오직 그 갚을 수 없는 주의 은혜를 내 안에 간직하고, 넘쳐 흐르는 주님의 은혜가 항상 공급되어 주위를 적시게 하옵소서. 오늘도 거거 받음으로 거저 주는 역사가 주의 몸 안에 충만케 하시고 흘러 넘쳐 세상을 변화시키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