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여러 가지 모양이 나타날 수 있다. 십자가를 지고 따를 수도 있고, 십자가 없이 따를 수도 있다. 아니면 십자가만 지고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 십자가를 지는 것 조차 종교의 모습으로 변질될 때 그것은 나에게 고통만 줄 뿐이지 생명의 변혁은 일어나지 않는다. 자기 목숨을 잃는 것 역시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후에 그 목숨을 다시 얻을 수 없다. 주님이 모든 것 되신다.
어제 말씀 28절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고 하셨는데, 오늘39절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는 말씀의 ‘목숨’과 28절의 ‘영혼’은 같은 헬라어 단어 ‘ㅍㅅㅋ헤 (쉽게 해서 푸쉬케)’다. 즉 목숨과 혼이라는 단어는 같은 단어인데, 인간의 생명이 아닌 거룩한 생명을 뜻하는 ‘조에’에 비해 푸쉬케는 인간의 혼, 즉 목숨이다. 이사야 2:22에는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라고 말씀하는데, 우리의 생명은 코의 호흡이 끝기면, 즉 목숨이 끊기면 끝나는 별 볼 것 없는 생명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주님을 위해 자신의 푸쉬케를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말씀한다. 이 ‘잃다’라는 동사는 ‘아폴루미’라는 단어인데 신약에 여러번 등장하고 사실 요한복음 3:16의 ‘멸망하지 않고’에서 ‘멸망’과 동일한 단어다. 즉 ‘죽이다, 멸망하다, 파괴하다, 끝내다’ 등의 뜻이 있는데, 자신의 푸쉬케를 멸망시키면, 죽이면, 파괴하면, 끝내면 얻을 것 (휴리스코, 마 7:7 찾으면 ‘찾을’ 것) 이라고 말씀한다. 강력한 역설이다. 여기의 시제 또한 재미있는데, 여기도 아오리스트이다. 즉 십자가를 지거나 죽는 것은 한번 과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십자가를 지고 계속해서 죽음에 넘기운다는 뜻이다. 우리의 혼은 정말 끈질기다.
아무튼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우리가 자살하라는 말씀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모든 삶에 있어서 우리의 푸쉬케에 십자가를 적용하여 자아를 죽음에 넘김으로 주님의 ‘조에’를 얻으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요 6:39)’는 것이 있다. 성경에서 수 없이 등장하는 이 ‘푸쉬케’라는 단어는 부정적인 의미로 많이 쓰였지만, 벧전 1:9에서는 ‘믿음의 결국 곧 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고 하며 오늘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주님께서도 한번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 처럼, 우리의 푸쉬케 역시 죽음으로 마지막 날에 다시 살고 또 완전하고 온전한 것으로 다시 찾게 된다.
소망없고 답이 없는 나의 기질에
십자가는 유일한 해결책이네
주를 향해 내 십자가 짊어질 때에
주는 조에 생명으로 바꾸신다네
주님,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는 이해가 되지만 하루를 살면서 십자가를 적용하는 것은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나의 이익과 안위를 먼저 따지고 주님의 것은 미뤄 놓습니다. 이런 나의 푸쉬케에 어울리는 것은 십자가임을 다시 봅니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한데 저는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삶을 살고도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가끔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나의 생각을 다스리시고 십자가를 사랑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