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을 지키는 데에 있어서 구약은 단호하다. 창세기부터 하나님께서 창조를 완성하시고 안식하신 것으로 시작해서 십계명의 네번째 계명이며, 구약 여러 곳에서 누누이 명령하며 지키지 않을 경우 백성에게서 끊어지고 (출 31:14) 거기에 안식일에 일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이라는 명령이 있다 (출 31:15, 35:2). 그래서 안식일의 문제는 유대인들에게 매우 민감한 이슈였다. 그러니 주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얼마나 미움을 받으셨을까.. 하지만 창조를 완성하시고 일곱 째 날에 안식하신 하나님은 정작 인간의 타락 후에 안식하실 수 없었고, 인간 역시 진정한 안식은 누릴 수 없었다. 진정한 안식은 주님 안에 있고, 안식일의 목적과 의미가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안식일은 말 그대로 몸과 마음이 쉼을 얻는 날인데, 오히려 ‘지키려고’ 들 때 더 안식하지 못한다. 이것 저것 조항을 만들어 어디까지가 쉬는 것이고 어디까지가 쉬지 않는 것인지 따지려 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의 고층 건물의 엘리베이터가 안식일 (토요일)에는 매층 마다 자동으로 서게 만들었다고 한다. 기계 자체가 프로그래밍으로 움직이는 것은 괜찮지만 사람이 누르는 행위는 일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기 스위치를 올리거나 불을 키거나 하는 것 역시 못하게 되어 있는데, 그러한 것들은 창조를 의미하기 때문이라나… 정말 안식일 지키려다 스트레스만 받겠다.
그래서 참된 안식이신 주님께서 오셨다. 결코 완벽할 수 없는 종교적 규칙과 율례를 모두 무효화 시키시고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참된 목적임을 주님께서는 보여 주신다. 이러한 비밀을 깨달았기에 사도 바울은 롬 14:5에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날에 차별을 두는 것도 주님 때문이고, 모든 날을 같게 여기는 것 역시 안식일이나 주일만 거룩한 날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모든 날이 거룩하며, 안식하는 날이고 부활의 날이기 때문이다.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는 (5절) 처럼, ‘주님 안’에 있을 때 참된 안식과 자유를 누린다.
이 안식일의 문제가 얼마나 구약에서 잘못 이해되었는지 밝히시기라도 하듯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피해 다른 곳으로 가셨을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들의 회당’으로 가셔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심으로 다시 한번 참된 안식이 무엇인지 보여주신다.
사람을 사랑하고 이해하려는 마음보다 규칙을 따지려는 마음이 더 강하다. 가정이나 교회에서도 많은 것에서 사랑과 이해가 우선되어야 함을 알면서도 현장에서는 그것이 쉽지 않다. 사랑과 이해 보다는 규칙을 따르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지런해야 한다...
주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고 참된 안식이시지만, 우리가 현실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래서 히브리서 4:11에서는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는데 궁극적으로 ‘저 안식’은 새 예루살렘 성에서 온전히 이루어지겠지만, 죄와 싸우고 현실적인 고달픔과 갈등 속에 살아가는 속에서도 매 순간 주님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안식을 취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힘써야’ 하는 것인데, 이 ‘힘쓰다’는 단어는 ‘스푸다조’라는 말로 ‘속히 행하다, 부지런히 하다, 열심히 노력하다’ 등의 뜻이다. 아.. 평화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듯 안식 역시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을 살면서 주님을 잊어버릴 때 마다 다시 돌이켜 주님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주님, 상한 갈대를 보면 보기에도 안좋아서 그냥 꺽어 버리는 것이 인간의 습성이지만, 주님께서는 삶에서 고통받고 상처받은, 또 종교적 기준으로 보면 처절히 실패한 상한 갈대 같은 인생을 꺽지 않으시고 주님의 안식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봅니다. 주님, 내 안에서 또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서 다시금 창조를 이루시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게 하셔서 온전한 안식이 이루는 날이 곧 오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