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는 여러 비유로 천국의 비밀을 말씀하시는데, 오늘 말씀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한다. 여기에 전에 모르던 것이 있었는데, 씨가 처음 뿌려지는 곳은 길 ‘위’가 아니라 길 ‘옆’이다. 원어에도 보통 길이라는 말을 쓸 때 ‘에피 (위)’나 ‘엔 (안)’ 이라는 전치사를 쓰는데, 여기서는 ‘파라 (옆)’라는 말을 쓴다. 즉 씨가 길 위에 떨어진 것이 아니라 길 가에 떨어졌다.
여러 곳에 씨가 뿌려지지만 길 위에는 뿌려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길’의 원어를 보니 ‘호돈’이라는 단어인데, 주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말씀하신 요 16:4에 같은 단어가 쓰인다. 즉 길은 주님을 뜻하기에 그 위에는 뿌려질 필요가 없다.
그러면 길 가에 뿌려졌다는 말은 무엇일까? 오늘 상황을 보니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주님께서는 그들과 거리를 두고 배에 올라 앉아서 말씀하신다. 주님을 따르고 그의 말씀을 듣는 많은 사람들 중에 정작 주님께 올인하지 못하고 주변만 배회하는 무리들이 바로 길 가이다. 그들은 뒤에 말씀처럼 듣기는 듣지만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받은 말씀을 뺏긴다.
각 장소에 대한 해석은 주님께서 내일 본문에 직접 해주시기 때문에 내일 묵상해 보겠지만, 오늘 말씀에서는 이 ‘씨’에 대해 묵상해 본다. 씨 뿌리는 자는 씨를 뿌리는데, 주님께서는 19절에 이 씨가 ‘천국 말씀’이라고 한다. 그런데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땅 자체를 더 좋게 하거나 땅 속에 금이나 은이 생기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백 배, 육십 배, 삼십 백의 결실을 한다. 일반적인 농사의 자연스러운 모습이지만 주님께서는 이것을 ‘천국의 비밀’ 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받아서 얻는 결론은 육신적 건강이나 물질적 풍요가 아니다. 우리가 좋은 땅으로서 주님의 말씀을 받을 때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 동일한 씨 즉 생명의 말씀이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로 배가 되는 것이다. 기쁨을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고 하지만 말씀이 결실하면 100 60 30배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으로 천국은 임한다.
제자들이 왜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는지 묻자 주님은 그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고 말씀한다. 아니 무슨 주님이 이러신가? 더 많은 사람들이 천국 비밀을 깨닫고 소위 ‘침노’해야 하지 않는가? 아.. 주님께서 목회를 하셨다면 소위 ‘성공적인 목회’는 힘들었을거다. 그런데 주님은 15절에서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시는데 바로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마음이 완악해지면 음성은 들어도 그 내용은 듣지 않는다. 또 대화의 기본인 상대의 눈을 바라보는 것 역시 거부하고 눈을 감는다. 이런 이들에게 주님은 깨달음을 주실 수 없다. 하지만 주님을 선생으로 모시는 제자들은 겸손함으로 주님께 와서 묻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깨달음이 주어진다.
주님 나의 삶의 모습 길 가이외다 바로 옆에 주 계셔도 따르지 않고
내 안에서 말씀해도 무시를 하며 사랑과 심판의 눈 못 올려보니
주여 나의 삶의 모습 길 가이외다 허나 그 생명 말씀 날 깨치시니
못난 나를 통해서도 결실하소서 그 생명 나눌 때에 풍성해지니
오늘 이 나눔에도 역사하소서
주님,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나의 삶은 길 가였고 가짜였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말씀대로 살지 않고 많은 때에 오히려 주의 말씀을 까먹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아침 다시 주를 바라볼 때 사망과 정죄보다는 다시 뿌려지는 주님의 생명을 받습니다. 주님의 생명으로 풍성케 하소서. 오늘 분량 만큼 성장케 하시고 결실케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