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는 13장에서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천국의 비밀을 말씀하시는데, 18-23절까지는 어제 말씀에 대한 설명이고 24절 부터는 ‘천국은 ~와 같으니’라고 비유하시는 말씀들이 있다.

뿌려지는 씨는 하나님의 말씀인 ‘로고스 (19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공기처럼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다.  소위 자연계시 특별계시로 나누지만 하나님은 말씀을 주시는데 있어서 차별이 없으시다.  하지만 길 가에 뿌려지게 될 때 즉각 원수가 와서 빼앗기 때문에 생명이 싹틀 수도 없다.

20-21절에는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라고 말씀하시는데, 말씀 자체를 들었을 때 정상적인 반응은 곧 감동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그리고 잠시 견디기도 한다.  하지만 말씀에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진리를 그냥 좋은 말씀이나 종교로 이해해 버린다.  그렇기에 상황적으로 어려워지면 돌아선다.

22절 가시떨기에 뿌려진 것은 아마도 나를 비롯한 많은 기독교인들이 경험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말씀을 듣고 뿌리도 내리기는 한다.  성경 공부도 하고 여러 가지 프로그램도 이수한다.  막 4:7에는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았다고 하는데 이는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 이라고 말씀한다.  성경 지식도 많고 소위 ‘신앙 생활’도 몇 십년 했지만 아직도 먹고 사는 염려, 아니면 오히려 돈이 풍족해질 때 그 순간을 즐기려는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한다…

그런데 위 세 가지 땅과 다른 ‘좋은 땅’의 차이는 그 땅 자체가 ‘좋은 (원어 칼로스, 아름다운, 탁월한, 뛰어난, 쓸모있는, 멋진 등의 뜻을 가진 단어로 많은 경우 주님을 가리킴)’ 땅이기도 하지만 또 하나의 차이는 바로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인 것이다.  즉 깨닫는 자가 바로 좋은 땅이다.  이 ‘깨닫다’ 라는 단어는 13장에서 계~속 나오는 말인데, 헬라어 ‘수니오’라는 단어로 어원은 ‘수니에미’이다.  재미있는 것은 ‘수니에미’라는 단어는 ‘순’과 ‘이에미’의 결합어이다.  ‘순’은 ‘with’라는 뜻이고 ‘이에미’는 ‘보내다’라는 뜻이다.  이 말이 왜 ‘깨닫다’의 뜻이 될까? 

이 말은 ‘생각 속에서 뜻을 조합하다’라는 뜻이 있는데, 잘 생각해 보면 우리가 ‘아는’ 것은 무언가 머리 속에서 조합되고 그것이 우리 생각과 이성으로 ‘보내진’ 것이다.  그런데 보내는 것이 무엇인가가 중요한데, ‘좋은 땅’에서 ‘보내진’것은 씨요, 말씀이요, 생명이다.  즉 생명이 우리에게 ‘깨달아지면’ 즉 하늘에서 머리로, 머리에서 마음으로 ‘보내지면’ 우리는 열매를 맺게 된다.  돌밭이나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 자체는 동일한 생명이었지만, 뿌려졌을 때는 단지 듣기만 하고 깨닫지 못했을 때 그것은 생명이 아니라 그냥 ‘정보’만 된다.  그래서 좋은 땅은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는 것이다.

24절 부터는 좋은 땅이 아니라 ‘좋은 씨’의 비유다.  위 좋은 땅의 비유에서 주님의 관심은 ‘땅’에 있지만, 이번 좋은 씨의 비유에서는 주체가 ‘씨’에 있다.  그리고 주목해야 할 점은 ‘천국은 ~~ 같으니’라는 점인데, 이 ‘같으니’는 ‘~같이 되다, 비교하다’ 등의 뜻이다.  즉 ‘천국’과 ‘좋은 씨’는 같이 간다.  내일 말씀은 좀 다르다.  그 점은 내일 나누기로 하고..

좋은 땅에서는 ‘씨 뿌리는 자’가 누구인지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말씀을 읽으며 그가 하나님이신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사람’이 뿌리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도들 혹은 사역자들 혹은 그리스도인들이 뿌리는 것을 의미한다.  즉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그것은 ‘좋은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 뿌리는 자가 천국과 ‘같이 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사람은 ‘제 밭’에 씨를 뿌리는데 각자의 위치에서, 사역의 장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전하고 나눈다.

그런데 ‘사람들이 (복수) 잘 때에’ 즉 영적으로 정신 차리지 않을 때, 혹은 함께 한 세대가 악할 때,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이 가라지가 괴물처럼 생겼으면 탄로나겠지만 보기에는 좋은 씨와 생김새가 비슷하다.  하지만 생명은 전혀 다르다.  벌써 ‘천국’의 부정적인 모습이 보인다.  천국은 '파라다이스'가 아니다.  거기에는 '비밀'이 있고 분별해야 하는 문제다.  결국 이 가라지는 자라서야 그 모습이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이게 된다.  그래서 그 결말이 분명하기에 주님께서는 추수 전에 뽑지 않고 곡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칠까 하여 가라지를 그대로 둔다.  좀 다 뽑아 버리셨으면 좋겠는데 주의 종들의 사역은 가라지를 뽑는 사역보다는 오히려 곡식을 돌보고 성장하게 하는 사역이 우선이다.  무슨 ‘이단연구’ 이런거에 에너지를 쏟을 필요가 없다.  그러다가 곡식도 상한다.  주님 먼저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함으로 좋은 씨가 성장하면 분별은 따라온다.

그래서 이 ‘좋은 씨’가 무엇인지 조금 더 연구할 필요가 있는데, 원어는 ‘스페르마’로 영어의 ‘정자’의 뜻인 sperm의 어원이다.  이 ‘좋은 씨는 ‘씨 뿌리는 자’에 의해 뿌려진다.  그런데 좋은 씨와 외관상 비슷하게 생긴 가라지는 ‘zizanion’ 이라는 단어로 보기에는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생명을 갖고 있다.  그리고 ‘원수’에 의해 뿌려진다.  바울은 갈 1:-87에서 ‘다른 복음은 없’다고 말하며 만일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것을 분명히 한다.  슬픈 것은 고후 11:4에서는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라고 말하며 이 가라지 같은 ‘다른 복음’이 타락한 인간에게 얼마나 친숙한지 경고한다.  우리에게는 좋은 씨가 필요하다.

주님, 이 ‘좋은 씨’에 대해 더 주목하기 원합니다.  작지만 그 안의 놀라운 DNA의 비밀을 간직한 주의 생명이 오늘도 저에게 뿌려지고 믿음의 형제 자매들에게 뿌려짐으로 그 생명이 우리를 사로잡으시고 우리 안에서 성장케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