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천국을 말씀하시며 비유를 드시는데, 어제 말씀 24절에서 '천국은 ~ 사람과 같으니' 라고 말씀하셨다. 이 '같으니'라는 원어는 '호모이오떼'라는 단어로 수동태 동사이며 시제는 부정시제이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비롯해서 앞으로 나오는 모든 천국의 비유는 동사가 아니라 '호모이오스'라는 형용사이고 따라서 '이다'라는 동사를 수식한다. 물론 이 '호모이오스'가 '호모이오떼'라는 단어의 어원이기에 둘은 같다고 할 수 있지만 성경은 분명히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 말 번역에는 이 차이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눈여겨 보니 바로 '마치'라는 단어를 쓰는 것을 보고 놀랐다. 오, 우리 개역성경이 차이를 제대로 설명하고 있구나.

이 '마치'라고 번역한 것이 주는 차이는 뭘까? 24절의 '호모이오떼'는 천국과 좋은 씨 그리고 사람은 같이 감을 보여준다. 즉 이들은 동일한 것이다. 하지만 뒤에 따라오는 천국의 모습은 마치 비슷하게 보이지만 분별이 필요함을 제시한다. 그렇지 않다면 뒤의 모든 비유들 역시 '호모이오떼'를 써야했을텐데 그렇지 않고 모두 '호모이아 에스틴'으로 말씀하신 목적이 있을 것이다.

오늘 말씀은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이고, 36절 부터는 어제 말씀의 설명이다. 내일 부분은 감추인 보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 그물 등의 비유를 하시며 계속해서 '마치'로 번역된다.

전통적으로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는 '천국의 확장'으로 해석되고 이해해왔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니 이것은 천국으로 들어오는 불순물 즉 '천국'의 부정적인 모습임이 확실해 진다.

겨자씨의 '씨'를 먼저 살펴보면 좋은 씨의 '스페르마'가 아니고 가라지의 'zizaion'도 아니며 '코코'라는 또 다른 단어인데, 이는 씨의 한 종류다. 재미있는 것은 32절에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의 씨는 또 '스페르마'이다. 즉 이 '코코'역시 '스페르마'의 한 종류이고 범주를 따지면 스페르마에 속해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것이 성장하여 보여주는 모습에 있다.

주님께서는 이미 12:33절에서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라고 말씀하시며 나무와 열매의 상관관계를 들어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다. 그런데 이 겨자씨는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고 마는데 열매는 맺지 못한다. 즉 원래는 푸른 풀이지만 자신의 모습이 성장하니 나무가 되고 마는 모습을 보이는데 마치 자신을 과시하는 듯 하다. 결론적으로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게 된다. '새'라는 존재가 성경에서는 항상 부정적인 것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4절에서 이미 주님께서는 길 가에 씨가 떨어졌을 때 새가 와서 먹어 버리는데 그 새를 '악한 자'라고 말씀한다.

그래서 이 비유는 '천국의 확장'이 아니다. 문제는 '천국'을 자꾸 '천당'이나 '파라다이스'로 이해하는 것인데, 주님께서 말씀하신 천국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을 확실히 해놓지 않으면 이해하는데 자꾸 걸림돌이 된다.

정리해 보면 좋은 씨의 모습을 닮았지만 다른 생명인 'zizanion'도 있는 반면, 좋은 씨의 종류이긴 하지만 역시 성장하고 보니 전혀 다른 존재로 나타나는 겨자나무가 있다. 요즘은 이런 것을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모두 농사에 대한 개념이 있던 당시에는 아마도 사람들이 금방 이해했을 것이다. 요일 2:19에는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라고 말씀하는데 후에 배교하거나 이단으로 빠지는 이들을 가리킨다. 즉 이 '천국'에는 진정한 주님의 생명을 가지고 성장하여 그 좋은 씨와 동일한 것을 100, 60, 30배 결실하는 '천국의 아들들'이 있는 반면, 동시에 '마치' 천국 같은 모양은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여러가지 문제들을 야기하는 어떤 것들을 미리 보여주신다.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많은 좋고 귀한 것들을 이루어 왔지만 동시에 심각한 문제들도 야기했다. 정말 부끄럽고 경악할 일들도 수 없이 행했다. 특히 정치적인 힘이 생기거나 정치와 결탁하게 되면 결론적으로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게 된 것을 보아왔다. 물론 이 말은 기독교는 정치를 떠나거나 정치에 관여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 본 생명을 잃고 다른 것을 추구할 때 '천국'의 부정적인 모습이 난무하게 된다.

뒤 누룩의 비유 역시 마찬가지이다. 성경에서 특히 누룩이 긍정적으로 언급된 적이 없다. 유독 출 12:39 "그들이 가지고 나온 발교되지 못한 반죽으로 무교병을 구웠으니 이는 그들이 애굽에서 쫓겨 남으로 지체할 수 없었음이며 아무 양식도 준비하지 못하였음이었더라" 라는 구절에서만 중도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누룩에 대한 어떤 대표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대한 설명이다.

아무튼 33절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는 구절을 잘 보면 누룩을 푼 것은 '여자'다. '사람'도 아니고 '여자'인데 성경에서 여자는 부정적인 표현에서 많이 쓰인다.  생명의 삶 해설에서 '누룩 덩어리가 가루 전체를 부풀게 하고, 힘차게 성장하'는 것으로 말했지만, 이미 서 말 즉 한 말이 약 14리터이니 총 42리터나 되는 가루를 그 보다 몇 배 몇 십 배 거품처럼 커지게 만드는 가짜이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 말로 여자가 '갖다 넣어'라고 번역했지만, 원어에서는 '안으로 숨겨'라는 뜻이다. 이 '숨기다'의 어원은 44절의 '숨겨'이다. 즉 이 여자는 정상적인 가족이 쓸 음식을 준비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양의 가루에 누룩을 숨겨서 그 원래의 양에 비해 뻥튀기를 한 것이다. 현재 기독교의 큰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이 '뻥튀기'다. 진리도 순수하게 전하면 사람들이 들을 마음이 없을 것 같아 '물질과 건강의 복'이라는 누룩으로 부풀리려 하고, 간증 역시 '세상적인 성공'으로 부풀리며, 사역도 부풀려지고, 교회 출석인원 조차도 부풀린다.

36-42절은 어제 말씀에 대한 해석인데, 어제 나눔에서 '사람'을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도들 혹은 사역자들 혹은 그리스도인들"로 해석했는데, 오늘 37절에는 그 사람이 주님이라고 말씀한다. 하지만 사실 그 씨 뿌리는 사역이 이제 우리에게로 넘어왔다. 주님께서 계실 때는 그 '사람'이 인자였지만, 이제는 우리 믿는 이들이고,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요 9:5)"고 말씀하신 것 처럼 주님께서 당시에는 세상의 빛이셨지만 이제는 우리가 세상의 빛으로 (마 5:14) 살아야 하며 씨 뿌리는 사역을 해야 한다.

오늘 이렇게 장구한 해석과 변명을 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결단코 천국이나 기독교가 이 땅에서 완벽하게 나타나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동시에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소위 '만사 형통' 하는 것은 아니며 주님의 사역이라고 해서 우리 보기에 항상 승리할 것이라고 하지 않으셨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종종 예수님께서 실패하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이 '천국의 비밀'을 잘못 이해하기 때문이다.

주님, 나의 눈을 열어 이 천국을 보게 하소서. 천국은 비밀임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주께서 미리 하신 말씀을 통해 낙심하지 않고, 주님의 생명을 가진 이들로서 오늘 그 천국의 비밀을 더 알고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