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헤롯은 주님께서 나실 때의 헤롯과는 다른 헤롯이다. 그는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이번 헤롯은 그의 후손인데 이름이 헤롯 안티파트로스이며 별명은 안티파스이다. 전에 한번 이것에 대해 나눈 적이 있지만, 이 이름은 구약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헬라식 이름으로 히브리식 어원이 있다면 아라드 일 수 있다고 하는데, 그는 이스라엘 출신이나 유대계의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에돔 사람이라고 한다. (위키)

그런데 이 헤롯의 이름이 위와 같이 '안티파트로스'인데 그 뜻은 '아버지를 대적하다'의 뜻이 있다. 또 그의 별명은 '안티파스'인데 '모두를 대적하다'라는 뜻이다. 사실 이 '안티파스'는 계시록에도 등장하는데 그 때는 세상에 속한 모든 악한 것을 대적하는 영적 군사를 의미하지만, 이 헤롯 안티파스는 안하무인이라는 뜻 같다.

그렇게 아버지를 대적하고 안하무인으로 보여도 오늘 말씀에는 침례자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는 무리들을 두려워했다. 또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요한이 살아 돌아온 것아닌가 하고 두려워했다. 세상의 권력있는 이들, 재벌들 처럼 전혀 두려움이 없어 보이는 이들 역시 인생으로서는 많은 두려움에 둘러 쌓여 있는데, 결국 그 핵심은 사망에 대한 두려움이다.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헤롯이 요한을 옥에 가두었다. 이유는 그가 이복동생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취했는데 그것을 가지고 요한이 옳지 않다고 했기 때문이다. 결국 요한의 사역은 묶이게 된다. 선지자가 악을 악이라고 선포하는 것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요한의 사역은 세상에 대한 심판 사역이 아니라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역이다. 요한은 이런 의미에서 이 때 자신의 사역에 충실하지 않았다. 결국 감옥에 들어가고 어처구니 없이 그가 비판한 헤로디아의 딸에 의해 (정확히는 헤로디아의 사주를 받음으로) 죽임을 당한다. 가장 위대한 선지자의 말로가 너무 애석하다.

내일 말씀 13절을 보면 이 어처구니 없는 죽음에 대해 주님께서 들으셨음에도 슬퍼하지도 않으시고 거기에 대한 일체의 언급도 없으시다. 지난 11장에서는 침례자 요한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제일 크다고 말씀하셨던 주님이 정작 그가 죽자 별 다른 말씀이 없으시다. 단호하신 주님의 어떠함을 볼 수 있다. 많은 사역들이 있고, 또 훌륭하게 보이는 사역도 많지만 결국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사역이 되기는 쉽지 않다. 항상 사역의 중심과 목적과 과정과 영광이 주님이 되셔야 하기 때문이다.

헤로디아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 침례자 요한은 그녀를 취한 것에 대해 헤롯을 비판했지만 정작 요한을 죽인 것은 헤롯이라기 보다는 헤로디아이다. 8절에는 '그가 제 어머니의 시킴을 듣고' 라고 기록하고 있고, 같은 내용을 기록한 막 6:28에는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다가 소녀에게 주니 소녀가 이것을 그 어머니에게 주니라'고 기록한 것 처럼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게하고 요한을 죽게 한 이 모든 것 배후에는 헤로디아가 있다.

요한의 비판으로 정작 기분 나빠하고 양심에 찔릴 사람은 헤롯인데 오히려 헤로디아가 더 날뛰는 모습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이복동생의 아내지만 아마도 왕비 자리가 더 탐이 나서 헤롯이 그를 취하자 옳다꾸나 하고 기꺼이 남편을 바꾼 것 같다. 이러한 배경이 있으니 그 자리를 위해 모든 것을 올인하는데, 자신의 딸이 연석 가운데 춤을 추게한다.

어릴 때는 잘 몰랐지만, 이 헤로디아의 딸의 춤이 그냥 전통춤은 아닌 것 같다. 많은 걸그룹들이 노출이 심한 의상에 관능적인 몸짓으로 흐느적 거린 것도 이제 꽤 된 것 같다. 어린 나이에 맞지 않는 관능적인 춤을 배우느라 애썼을 것을 생각하면 씁쓸한데 아마도 헤로디아의 딸 역시 그러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어떤 이들은 이 춤이 옷 가지를 하나씩 벗는 매우 퇴폐적인 춤이었을 거라고도 한다. 그런 춤에 모두들 정신나갔다...

궁중에는 퇴폐적인 연락이 판을 치고 그 가운데 가장 큰 선지자가 개죽음을 당한다. 천국이 이미 임했음에도 이 세상에는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 처럼 보인다. 오히려 더 타락하는 것 같고 소망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내일 말씀은 다시 한번 천국을 보여준다. 오늘이 힘들어도 내일이 있다. 이 세상의 삶이 힘들어도 영생이 있다. 세상은 심판을 향해 내닫지만 동시에 천국이 존재한다. 이것이 믿음이다.

주님, 우리에게 주신 영생을 다시 한번 묵상합니다. 이 현세에도 여러 가지 누릴 수 있는 것들이 있지만 비밀스럽게 임한 천국을 부지런히 찾는 마음을 주시고, 영안을 주셔서 영원한 생명의 가치를 다시 한번 새길 수 있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