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과 물에 빠지는 베드로에 대한 오늘 말씀은 너무도 유명해서 이를 묘사한 그림이 수 없이 많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 이 상황을 베드로가 물에 빠져가고 그를 건지시는 주님을 많이 그렸다.  아마도 그 부분이 제일 드라마틱해서 그런가 보다.  그리고 그러한 그림들을 보면 거의 대부분 주님과 베드로를 부각시켜서 배에 타고 있는 다른 제자들은 비교적 매우 작게 그리거나 아예 그리지 않은 경우도 있다.

전에는 이 말씀을 읽으며 당연히 주님과 베드로만 생각했었다.  그리고 세상 살이에 지쳐 실패할 때 주님께서 우리를 구해 주시는 것으로 이해하곤 했다.  그런데 이 내용은 세상 살이 보다는 믿음에 대한 것이고, 주님을 바라보는 대신 바람이 몰아치는 것을 바라볼 때 좌절하고 염려와 걱정에 빠져드는 것임을 배운다. 

그런데 사실 그 조차도 아닌 것 같다.  오늘 묵상해보니 난 베드로도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물에 빠져가는 베드로를 건시지며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신 것 처럼 베드로는 이런 작은 믿음이라도 있었고 주님도 인정하셨다.  하지만 배 밖으로 나오는 것은 상상도 못했던 다른 제자들은 아예 그런 믿음도 없었다.  베드로가 ‘오라’는 주님의 말씀에 배 밖으로 발을 옮길 때 아마도 배 위의 다른 사람들은 속으로 ‘아니 미친…’ 이라고 외쳤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베드로가 주님처럼 공중에 잠시 떠 있자 놀랐다가 물에 빠지기 시작하자 속으로 ‘그것봐라 그럴 줄 알았다’ 라고 비웃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과 베드로가 다른 점은 베드로가 체험한 것을 그들은 하지 못한 것이다. 

신앙 생활을 하며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말씀도 배우고 여러 가지를 한다고 하지만 정작 물 위를 걸으려는 시도에 대해 주님께 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를 하다 실패한 이들에 대해 드러나게 혹은 속으로 조소하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나는 시도도 못 해 보았다.

그런데 베드로는 왜 주님께 자기도 물 위를 걷게 해 달라고 구했던걸까?  호기심에?  자신의 믿음을 시험해 보려고?  아니면 해봐서 성공하면 자신을 과시하려고?  생각해 보면 베드로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호기심이나 호기로 그런 것 보다는 즉각적으로 즉 순수한 동기로 주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시니 자기도 걷고 싶었던 것 같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이런 순수함을 사랑하셨던 것 같다.  좀 거친면도 있고 어부로서 못 배운 면도 있지만 베드로는 순수한 마음이 있었다.  그러고 보면 믿음은 순수한 마음을 요구한다. 

주께서 오라 하실 때

발 내려 물 위에 놓았지

주 향해 몇 걸음 걸었어

그도 걷고 있었어

물결 높아 바람을 느꼈어

소리도 심해져 갔지

어두움 속으로 빠져가는

그 보며 오히려 안도했어

하지만 주 그 손 잡아 일으키시고

사랑으로 말씀하네

믿음 없다 아니라 아직 적은 믿음이라며

의심의 순간도 주 돌보시네

구하지도 못했던 나

적은 믿음도 없었지만

주님 오셔서 기쁨되시며

의심사라지네

나의 믿음되시네

주님, 진정한 믿음 생활은 사실 물 위를 걷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생각해 보면 언젠가 시도를 했었지만 물에 빠져간 기억  때문에 다시 시도할 마음이 사라졌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물에 빠진 베드로를 건지신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배에 오르시고 바람은 그쳤음을 봅니다.  오늘의 배인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임재만이 내 믿음의 목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