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11장에는 가버나움과 고라신 그리고 벳새다 지역에 가셨고, 13장에서 고향 즉 나사렛으로 다시 가셨다가 14절에는 배를 타고 빈 들에 가셔서 오천 명을 먹이시고 그 후 즉시 제자들을 배에 태워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막 6:45) 후에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을 만나시고 도착한 곳이 게네사렛 땅이다. 그리고 나서 오늘 말씀에는 두로와 시돈으로 가셨고 29절에는 다시 갈릴리 호숫가에 오셨다가 39절에는 마가단 지경으로 가신다.
Attach한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나사렛은 디베랴에서 서남쪽으로 약 15마일 정도 떨어져 있고, 5천 명을 먹이신 곳은 아마도 지도 왼쪽 위 쯤이 아닌가 추정한다. 그리고 두로와 시돈은 거기서도 50-100 마일 정도 한참 떨어져 있는 레바논 남쪽과 맞다은 지역이다. 그래서 주님은 거기서 이방 가나안 여인을 만나신다.
이러한 주님의 경로를 보며 질문이 생긴다. 먼저 가버나움과 고라신에서 사역하시다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그런데 후에 다시 그 근처 빈들로 가셨다. 즉 첫번 째 질문은 왜 계속 왔다 갔다 하셨을까이다. 여행 경로를 실속있게 짜려면 여행 거리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 좋은데 주님은 그러지 않고 가신 곳을 또 가시고 멀리 두로와 시도까지 가셨다가 또 다시 오시고 그런 행적을 보이신다. 그런데 주님은 놀러 여행 다니신 것이 아니라 영혼 구원이라는 명확한 목적이 있으셨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대로 잃어버린 영혼을 구하러 다니셨다.
두번 째 의문은 오병이어 기적 후에 제자들을 벳새다로 보내셨는데 그들이 도착한 곳은 이상하게 게네사렛 이었다는 점이다. 14장 34절은 “그들이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라고 했는데 지도를 보면 빈 들에서 벳새다로 향해 갔다면 그 근처 어디엔가로 가야하는데 다시 오히려 거꾸로 돌아왔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바람에 밀려서 그랬을까? 34절에 ‘그들이 건너가’ 라고 번역했기 때문에 갈릴리 바다를 가로질러 간 것 같게 들리고 또 영어 번역들도 역시 ‘crossed over’이라고 해서 마치 한 지역에서 반대편 다른 지역으로 간 것 처럼 들린다. 그런데 이 단어의 원어를 보면 ‘디아페라오’인데 ‘물이나 강을 건너다’ 라는 뜻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단어가 항상 반대편으로 간다는 뜻은 아닌 것이다. 즉 물이나 강을 거쳐 나왔을 때 이 단어가 쓰인다. 그래서 막 5:21에는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라고 기록하며 친절하게 ‘맞은편으로 건너’ 갔음을 말해준다.
또 하나의 질문은 오늘 생명의 삶 해설을 읽으며 생긴 것인데, 왜 주님께서는 부러 50-100마일이나 떨어진 두로와 시돈까지 가셨을까? 그리고 가나안 여자가 외칠 때 고작 하신다는 말씀이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다고 하신다. 그럴려면 왜 가나안 사람들의 지방인 두로와 시돈까지 멀리 가셨나? 그런데 지난 11장 21절을 보니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고 하셨다. 즉 벌써 주님은 두로와 시돈에 오실 계획이 있으셨고, 이방에게도 주님의 은혜를 베푸실 준비가 되어있었다. 이것은 요한복음 4장에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려고 부러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셨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 가나안 여인은 처음 주님을 ‘다윗의 자손이여’ 라며 자신의 위치와는 상관없는 호칭으로 잘못 불렀고 주님께서 거기에 대한 응답이 없으시자 여인은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며 고쳐 불렀다. 그러고도 주님은 이 여인에 대해 모역적으로 들리는 ‘개’라는 표현을 쓰신다. 막 7:26에는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기록하는데 이 여자가 배우지도 못한 천한 여자가 아님을 말한다. 문화인의 대명사 헬라인이었고, 더우기 수로보니게 족속이다. 수로보니게는 Syrian Phoenicia 라는 말인데, 한 때 꽤 힘을 쓰던 강대 문명족이었다. 그럼에도 여인은 자신을 ‘개’로 인정하고 ‘부스러기 은혜’를 구하여 주님께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는 칭찬과 약속을 얻어낸다.
주님의 여행 경로와 사역의 방향 그리고 큰 은혜가 되시려는 그의 시험하심은 인간의 짧은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다.
주님, 제가 이방되었을 때, 소위 모태 신앙이었지만 주님과는 별 상관없고 주관적인 관계도 없었을 때 주님은 두로와 시돈처럼 멀었던 제게 찾아오셨습니다. 저에게까지 찾아 오실 필요도 없으셨고, 저는 주님의 그 부스러기 은혜를 사모하지도 않았는데 그런 저도 긍휼하게 여기셔서 저에게도 은혜가 되셨습니다. 주님이 최곱니다! 사랑합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