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로마서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그리고 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라고 하며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차별이 없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말씀한다. 그런데 차별은 없지만 은혜가 주어지는 방법에 있어서는 조금 차이를 보이는데 그 이유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 (요 4:22)'기 때문이다. 즉 이방인들도 그리스도 이름 안으로 믿어 구원받지만 구약을 이미 알고 있는 유대인들 만큼은 그 내력을 알기 쉽지 않다.
학자들은 마태복음이 유대인들을 우선 대상으로 쓰여진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은혜는 유대인들에게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하게 미치는 것을 마태복음 여러 곳에서 보게 되는데 오늘 칠병이어 사건도 그렇다. 이미 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제자들은 33절에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게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까'라고 말하는데 바로 며칠 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오병이어 사건을 경험했음에도 그들은 같은 질문을 한다.
전에는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에 대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무슨 치매에 걸린 것도 아니고 주님께서 한번 하신 것은 실수지 또 하실 수 없었다고 믿었나? 그런데 오늘 해설을 보니 이번 먹이시는 사 천 명의 사람들 대다수는 이방인들이다. 이방인들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제자들은 아마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은 먹이셔도 이방인들까지 먹이시지는 않을거라 생각했나보다.
이러한 유대인 선민의식이나 차별의식은 사도행전에도 나타나는데, 10장 45절에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라고 기록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주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말씀하셨지만 이 때까지도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계속해서 선민이라고 생각했었나보다.
사도 행전에서 성령이 부어 주신 것, 즉 위로 내리심을 경험한 것은 크게 두번인데, 하나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처음으로 유대인들에게 내리신 것이고 다음이 바로 10장에서 이방인들에게 내리신 사건이다. 19장에도 등장하지만 그 때는 '부으심'이 아니라 '임하심'이다.
다시 오병이어와 칠병이어로 돌아와서, 오병이어는 오천을 먹이시고 열 두 광주리가 남았고 칠병이어는 사 천을 먹이시고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다. 5는 4 더하기 1로 유대인을 말하고 4는 세상 혹은 이방을 말한다. 12 광주리는 3 곱하기 4 이고 일곱은 3 더하기 4이다. 이러한 해석을 하면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미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더 분명해 진다.
주님께서는 유대인들과 같이 이 사천 명도 동일하게 불쌍히 여기셨고 동일하게 그들 가운데 있던 칠병이어로 축사하시고 떼어 주시고 모두 먹이셨다. 차별이 없으시다.
주님, 주님의 은혜는 정말 너무 풍성해서 미치지 못하는 곳이 없습니다. 나의 생각으로 어떤 곳은 하나님의 은혜가 미치지 못할거라 판단하지 말게 하시고 전혀 불가능해 보이는 곳, 세상의 어둠과 신음이 가득한 여러 곳에도 미치시는 주님의 은혜를 보게 하소서. 그러한 곳에 은혜를 들고 갈 주님의 종들을 일으키시고 힘 주소서. 나의 가정에도 더욱 은혜가 넘치게 하시고, 내 마음 내 깊은 곳에도 은혜가 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