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자들이 계속 연구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물질이다. 그 중에 시간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과연 시간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오늘 말씀에는 소위 ‘변화산’ 이야기가 나오는데, 주님께서 영광의 모습으로 변화하시고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말씀하신다. 그런데 모세와 엘리야는 이미 죽은 사람들이다. 이들이 어떻게 지금 주님과 함께 말하고 있을까? 그들은 이미 부활했을까? 고전 15:20은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라고 기록하며 주님의 부활이 처음임을 분명히 한다. 더우기 모세는 그의 시신이 어떻게 됐는지도 불분명하다. 그럼 이 변화산의 모습은 무엇일까?
아마도 시간을 초월하신 주님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성경에서 특히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에서 시제는 매우 중요하고 복잡한 요소인데, 오늘이 바로 그 정점에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주님은 시간을 창조하셨기에 또한 초월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에 이미 부활하셔서 모세와 엘리야도 부활시키신 후 그들과 말씀하는 모습을 제자들에게 미리 보여 주신 것 같다. 이것은 마치 이미 재림하신 주님의 모습을 묘사하는 계시록과 같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영광의 구름 속에서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놀라서 엎드려졌다. 주님께서 두려워 말라고 손을 대시자 제자들은 눈을 떴는데, 모세와 엘리야는 사라지고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주님이 모든 것 되신다.
주님께서는 또 궁금증을 유발하는 말씀을 하시는데, 요한이 바로 이미 온 엘리야이고,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11절)할' 것을 말씀하신다. 그런데 헬라어에는 시제가 ‘먼저 오고 있는 중이고, 모든 것을 회복할 것이다’ 라고 한다. 이건 또 무슨 말씀인가? 요한은 이미 왔는데, ‘오고 있는’ 엘리야가 또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회복할 (미래) 것이다’. 과연 이 엘리야가 누구일까? 구약의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리운 사람이다. 그런데 히 9:27에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고 말씀하며 인간은 모두 한번 죽는 것을 말씀한다. 즉 죽음을 보지 않은 엘리야도 한번은 죽어야 한다는 공식이 설립한다. 그래서 주의 길을 예비했던 요한은 엘리야의 모습이 있었고 또 이미 죽임을 당했지만, 주님의 재림을 위한 엘리야가 또 오는데 그는 계시록의 주님 처럼 ‘오고 있는 중’이며 또 ‘모든 것을 회복할 것’이다.
이 ‘회복하다’라는 단어는 ‘아포카띠스테미’로 원래의 상태로 복구함을 의미하는데, 신약에 9번 쓰였고 모두 ‘회복’의 의미로 쓰였지만, 히 13:19에는 ‘너희에게 돌아가기’ 즉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바로 주님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들린다. 요한 혹은 엘리야의 일은 ‘회복’ 혹은 ‘예비’의 일이지만, 주님의 일은 아담의 원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생명으로 만물을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마지막 아담’이 되신다 (고전 15:45). 주님은 옛 사람 아담을 끝내셨다.
그런데 만일 ‘한번 죽는 것이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면 휴거는 어떻게 되는 걸까? 휴거는 죽음을 보지 않고 올림받는다. 휴거 바로 직전에 잠시 죽었다가 들림 받는가? 바울은 이에 대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살전 4:16)’나고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심을 말씀한다 (17절). 아마도 이 휴거를 통해 영원한 몸으로 갈아입을 때 육신의 죽음을 통과하나보다. 신비롭다.
주님, 시간과 공간은 신비롭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창조하신 주님은 더욱 신비롭습니다. 주님만이 모든 것 되시고 이러한 주님을 더 알고 누리기 원합니다. 그 앞에서는 두려워 엎드러질 수 밖에 없는 저희들이지만, 주님께서 이 아침에도 손을 대시고 일어나라 말씀하시기에 죄송함과 감사함으로 나아옵니다. 다시 정결케 하시고 현재에 묶여 살지 않게 하소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주님을 의지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