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9:1에는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라고 기록한다.  제자들은 이미 각 고을로 가서 주님의 이름 안에서 귀신도 쫓고 병도 고치는 사역을 했다.  그런데 유독 이번 사건 만은 ‘능히 고치지 못’했다.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이 작기 (원어에서는 아예 ‘없기’) 때문이고, 그들에게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에 대해 말씀한다.  21절은 ‘없음’으로 나와있지만 헬라어 원본에는 몇 몇 사본에서 발견된 것으로 ‘그런데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 아니면 나가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다.

몇 가지 질문이 생기는데, 첫째는 왜 이미 능력과 권위를 받은 제자들이지만 고치지 못했고 이에 대해 ‘믿음 없음’을 말씀하시는가?  특별한 믿음을 의미하는 걸까?  둘째는 과연 ‘믿음’이라는 것이 ‘겨자씨’ 한 알 만큼이라는 측정 (measure) 가능한 것일까?  예를 들어 어떤 이는 믿음이 1 인치 정도 있고 어떤 이는 1 미터 정도 있을까?  아니면 어떤 이는 정말 겨자씨 만하고 다른 이는 수박만 할까?  셋째 질문은 왜 믿음을 말씀하시면서 ‘그런데 기도와 금식’도 말씀하시는가?

그러면서 질문이 하나 더 생긴다.  자기의 아들이 아프다고 찾아온 이에게 주님은 ‘쯧쯧 얼마나 힘드니?  얼마나 맘 고생이 많았니?  내가 고쳐 주겠다’ 라고 위로의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셨다.  왜 주님은 이런 반응을 보이신 걸까?  그런데 잘 읽어보니 전에 귀신이 나가고 청소된 집에 아무도 없자 일곱 귀신이 들어간 예화가 생각난다.  주님께서는 병을 고치실 때 병의 원인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는데, 하나는 약하여 병 든 것이 있고 다른 하나는 귀신이 들어서 병이 든 경우다.  그런데 이 아들의 경우 귀신에 의한 것이고 그래서 주님은 병을 고친 것이 아니라 ‘꾸짖으시니’ 다이몬이 나갔다.

아마도 이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는 말은 이 다이몬 (우리 말 귀신으로 번역한 것은 좀 헷갈릴 수 있기에)에 관계 있는 것 같다.  전에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말씀하셨지만 이제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말씀한다. ‘패역’은 ‘디아스트레뽀’ 라는 단어로 ‘굽어지다, 뒤바뀌다, 타락하다, 정도에서 벗어나다,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다’ 등의 뜻인데, ‘음란’과 매우 비슷하게 들린다.  즉 이러한 것은 하나님을 모시지 않고 대신 다이몬에 씌운 세대를 말한다.  그래서 주님은 ‘꾸짖음’이 필요했고 즉시 다이몬은 나갔다.

제자들의 실패해 대해 주님은 ‘믿음 없음’을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기도와 금식’을 말씀한다.  ‘믿음’은 ‘믿쑵니다!’ 라고 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것은 믿지 못하기 때문에 힘주어 말하는 것이고, 그 보다는 믿음은 나를 내려놓고 기도하는 것이다.  내 목숨과 관계된 금식으로 나의 육신의 힘을 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의 기본이다.  즉 겨자씨는 믿음의 측정 단위라기 보다는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주님께서 단적으로 보여 주신 것 같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것은 나의 어떠함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는 것이지만, 이를 계속 소유하기 위해서는 기도와 금식의 삶이 필요하다.  그래야 다이몬을 꾸짖을 수 있는 권위도 생긴다.  만약 세상이 추구하는 연락과 즐거움에 빠져 산다면 믿음도 없는 것이고 다이몬을 꾸짖을 권위 역시 있을 수 없다.  주님께서는 이미 당신의 이름의 권위와 권세를 주셨지만, 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제자들 역시 권위가 나타나는 삶을 먼저 살아야 함을 보여준다.

주님, 정말 저는 믿음이 없음을 봅니다.  영생을 바라본다 하면서 이생에 급급한 삶을 사는 저를 발견하고 놀라고 실망합니다.  다이몬을 꾸짖을 만한 권위와 거룩함이 저에게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주셨지만, 주님께 더욱 나아감으로 주님을 더욱 얻음으로 주께서 온전히 나의 권위 되실 것을 압니다.  이생의 즐거움을 누리기 원하지만  순간 순간 돌이켜 기도와 금식의 삶을 살게 하소서.  나의 계획이나 생각을 내려놓고, 내가 할 수 있다는 육의 힘을 빼고 주님께로 다시 관심을 돌리게 하소서.  주님을 의지하는 만큼, 주님을 누리는 만큼 나의 믿음 될 것을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