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화는 아직도 유교적인 것이 많아서 장유유서를 중요시한다. 성경 역시 유교식으로 이해할 때가 많은데 '천국에서는 누가 크냐'는 쟁논에 대한 주님의 말씀은 장유유서와는 전혀 다르게 들린다. 한국 문화에서는 ‘제대로 된 가정 교육’을 받았다면, 음식을 먹을 때도 어른이 먼저 수저를 들고 식사를 시작한 후에야 아이들이 음식을 먹을 수 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남미 문화에서는 그 반대인데, 아이들에게 먼저 먹으라고 한 후에 어른들이 먹는, 아이들을 배려하는 문화가 있다. 서양 문화에는 ‘여자와 아이들 먼저’ 라는 구호가 있어서 약한 자들을 먼저 배려하는 문화가 있는데 바로 이것이 오늘 말씀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주님의 제자들은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문제가 바로 앞에 놓여있고, 아마도 그것을 ‘천국’으로 이해했던 것 같다. 그래서 새로운 나라가 시작될 때 과연 누가 제일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는가에 관심이 컸다. 하지만 3절에서 주님은 그에 대해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며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신다. 여기에는 두 가지 동사가 있는데 ‘돌이켜’와 ‘되지’ 라는 동사다. ‘돌이켜’는 ‘스트라뻬테’라는 단어인데 계 11:6에는 물을 피로 ‘변하게’ 할 때를 제외하고는 말 그대로 몸을 돌이키다는 뜻으로 쓰였다. 즉 대부분 ‘방향성’을 의미한다. 제자들은 지금 방향 자체가 잘못 되어있다. 주님의 마음과는 전혀 다른 것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돌이킴’이 필요하다.
‘되지’는 ‘게네스떼’ 즉 말 그대로 ‘~이 되다’의 뜻으로 성경에 수도 없이 나온다. 제자들은 모두 성인이었을텐데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함을 말씀하신 것 처럼 어른들이 된 제자들이 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한다. 즉 방향성과 더불어 이러한 ‘됨’이 필요하다.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에 있어서 몇 가지 떠 오르는 구절들이 있는데, 마 5:20에서는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시고,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또 요 3:5에서는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러고 보면 이 모든 것들이 다 연관되어 있는데 그 핵심이 바로 오늘 말씀 즉 ‘어린 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것에 있다.
행위로는 우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을 수 없기에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의’를 구해야 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뜻을 알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겸손히 주님 앞에 나와 여쭤야 하며,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 역시 타고 난 천연적인 나의 모습으로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인정하고 어린 아이 처럼, 아니 오히려 아예 새로 태어남을 통해서 천국에 들어감을 본다.
교회라는 것이 분명 천국의 모형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약자를 배려하기 보다는 잘난 사람들이 그 천연적인 잘남을 드러내는 곳이 되어 버릴 때가 적지 않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주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말하는데 여기에는 주님 당신께서 먼저 ‘돌이키시고’ ‘낮추심’을 보여 주신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한다.
교회 안의 많은 문제는 ‘누가 크냐’에서 비롯된다. 모두 아이들 처럼 자신을 먼저 낮추는 진정한 섬김이 있다면 교회는 천국이 될 것이다. 나부터 주님의 겸손을 배우자. 내가 하려는 겸손은 위선이고 위장이며 호시탐탐 높아지려는 마음이 안에 도사리고 있지만 내가 주님 안에 있을 때 나는 그 분의 겸손을 배우게 된다.
주님, 주님의 겸손을 배우게 하소서. 주님을 통하지 않고 나의 삶 속에서 항상 내가 하나님 되려고 합니다. 내 안의 숨은 교만을 폭로하시고 그것과 씨름하게 하소서. 돌이키게 하소서. 낮은 나의 본 모습을 잊지 않게 하소서. 주님의 본 보이심이 내게 생명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