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고 그 어려움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신다.  이에 대해 제자들은 ‘몹시 놀라’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부자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부를 얻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구약의 많은 말씀 역시 하나님 말씀을 지켜 행하면 물질적 부를 약속하신 것들이 많으니 무리가 아니다. 

사실 기독교에서도 소위 ‘복’ 받기 위해 여러 종교 행위를 권유한다.  예를 들어 십일조를 하면 물질적인 어려움이 없게 된다는 설교를 많이들 하는데 문제는 십일조를 함으로 성공한 간증도 존재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존재하는 것에 있다.  더우기 비신자들의 상대적인 더 큰 부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원불교를 믿는 삼성의 이건희 일가는 그렇다면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인가?  이러한 논리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부자가 모두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것이 아니고 실은 그들의 부함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지 않게 됨을 말씀한다. 

이전에 ‘천당’을 묘사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고래등 같은 집 소위 ‘맨션’이었다.  주님 말씀 따라 잘 살다 죽으면 천당에 가서 영원히 큰 집에서 산다는…  그러한 말은 성경적이지도 않지만 지금 현실에서 이미 그러한 맨션에서 살고 있는 부자들에게는 별로 어필하지 않는다.  이미 얻었기에 더 구할 필요가 없다.  물론 영원의 문제는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믿고 증명하랴…

눈여겨 볼 것은 23절에는 주님께서 ‘천국’이라는 말을 하셨지만 24절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한 것이다.  이 둘은 사복음서를 비교해 보면 많은 경우 혼용되어 쓰였지만 오늘 말씀 바로 두 절에서 이렇게 다른 말로 하신 것은 신기한 일이다.  이 문제에 대해 부자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놓고 생각해 보면, ‘천국’은 다가올 새로운 시스템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이제껏 구약에서도 계속 있던 하나님의 다스림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럼으로 주님께서는 ‘낙타’와 ‘바늘 귀’ 예를 들으시며 구약의 부자들이 모두 구원얻은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신다.

재미있는 것은 주님께서 ‘천국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제자들이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라고 한 점이다.  즉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구원을 같은 선상에서 이해한 것이다.  이것은 맞을 수도 있지만 온전하지 못할 수도 있다.  시간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고 답하신다.  많은 경우 우리의 질문은 우리의 능력과 이해를 벗어나는 것들이지만 그러한 것들에 대해 궁금해 한다.  하지만 뒤돌아 보면 하나님께서 하셨음을 발견하게 된다.  재물이라면 동전 한 닢도 허투루 쓰지 않는 부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발견할 때 그들의 모든 재물을 하늘에 쌓기 시작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주를 위해 '허비'하기 시작한다.  이성적으로 혹은 논리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을 때 구원이 임했음을 알 수 있다.

베드로의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라는 질문에 대해 주님께서는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 ‘세상이 새롭게 되어’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원어에서는 ‘팔리게네시아’라는 신약에 딛 3:5에 더불어 단 두번 만 쓰인 단어가 등장하는데, 디도서에서는 ‘중생’으로 번역을 했다.  ‘팔린’이라는 단어와 ‘게네시스’의 합성어인데, ‘팔린’은 ‘다시, 새롭게, 반면에’ 등의 뜻이고 ‘게네시스’는 영어의 genesis로 ‘원천, 오리진, 출생’ 등의 뜻이다.  이 둘이 합쳐서 ‘거듭 남, 갱생, 새 창조, 중생(regeneration), 홍수 이후의 지구의 갱신, 등등’의 뜻으로 이해한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정말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을지는 모르겠지만 주님께서는 인정해 주시고 열 두 제자들에 대해서도 주님께서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라고 말씀한다.  그런데 이것은 현재의 어떤 정치적 권력을 의미하진 않는다.  후에 주님께서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지만 제자들은 정치적 권력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30절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는 말씀은 주를 따르는 많은 이들 중에서 발생하게 될 일도 의미하지만 동시에 ‘너희 열 둘’ 중 하나인 가룟 유다를 포함한다. 

어쨌거나 세상이 새롭게 되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주님의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을 통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새롭게 된 것이 있고, 또 앞으로 천년 왕국이 임함으로 온전히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완성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29절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는 말씀 역시 그 시기에 있어서 이생도 있지만 동시에 다가올 천국에서의 상을 의미한다.  현재의 삶에서 주님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출신 관계까지 끊어버리는 사람은 그에 대해 ‘교회’라는 새로운 가정과 ‘공동’이라는 많은 재물을 허락하시고, 후에는 실질적인 상을 약속하신다.

이러한 모든 것이 나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제 페이스 북에 어떤 목사님이 “"자기 만족, 자기 충족감, 자기 의로 가득차 있는 것은 죄 중에 죄입니다.  [로이드 존스, "영적 화해"]” 라고 올린 것을 보았다.  나는 물질이 많지는 않지만 자기 만족과 자기 충족감, 그리고 자기 의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은 내가 분명 부자임을 폭로한다.  아.. 주님 없이도 나는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이 아직도 수시로 올라온다.  이런 면에서 나는 부자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기 두렵다..

주님,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주님의 은혜의 역사가 오늘 저의 마음을 감동시키시기 원합니다.  성령님의 감동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저입니다.  이것이 핑계거리가 되면 안되겠지만 주님이 더 필요합니다.  자기 만족과 자기 충족감과 자기 의에서 나를 구원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