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어개의 단어가 함께 등장할 때 어울리지 않는 것이 꽤 있는데, 오늘 등장하는 왕과 나귀 새끼가 그렇다. 요즘 소위 ‘메시아닉 쥬’가 화자되는데, 왜 그들은 Jewish Christian이라고 하지 않고 Messiahnic Jew라고 할까? 그 이유는 ‘크리스천’과 ‘유대인’이라는 두 단어가 매우 어울리지 않는 단어 조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크리스천이면 더 이상 유대인은 아니다. 유대인은 유대교의 사람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메시아닉 쥬들의 정체성에 대해 좀 의문이 간다. 그들은 크리스천인가 아니면 유대인인가?
아무튼 왕과 나귀는 어울리지 않는데 모양새가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왕으로서의 품위나 권위가 없게 보인다. 주님께서는 많은 것에서 역설을 말씀하셨는데, 오늘 말씀의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은 아마도 그 절정이 아닐까 한다. ‘왕’으로서 ‘입성’하는 모습은 분명 권세와 영광을 나타내야 하고, 그 탈 것은 쌍두 마차나 웅장한 수레 혹은 가마, 아니면 적어도 준마는 되어야 왕의 권위가 설텐데, 고작 나귀고 더우기 새끼이며 그것 조차 ‘행사’ 바로 전에 누구에게 빌려서 겨우 조달한 것 같은 모습이다. 만약 교회의 행사가 이렇게 된다면 책임자는 면책을 면하지 못할지 모르겠다. ㅎㅎ
그래서 여기서도 ‘천국’을 볼 수 있는데, 주님의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고 그 권세도 폭력 혹은 압제가 가득한 이 땅의 그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나귀 그것도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다. 재미있는 것은 다른 복음서에는 모두 ‘나귀 새끼’만 기록하는데 마태는 ‘나귀’도 언급한다. 즉 주님은 분명 ‘나귀 새끼 colt’에 타셨고, 마가 누가 요한에게는 그것만 보였고 그에 대해서만 기록했지만, 주님께서는 2절에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둘을)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고 하셨다. 다른 복음서와 같이 미리 기록된 것을 말씀하며 주님의 왕 되심을 분명히 했지만, 마태는 마가 누가 요한이 보지 못했던 것을 보았다. 즉 타고 갈 나귀 새끼와 더불어 나귀도 함께 데리고 오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록했다.
타고 갈 것이라면 그냥 나귀 새끼 한 마리면 족했을텐데 주님은 (그 어미?) 나귀도 함께 데리고 오게 하셨다. 잘은 모르지만 한낱 미물이라도 그 어미에게서 떨어지는 것에 대해 주님은 가엾게 여기셨을까? 아니면 입성 후에 어미 나귀가 그 새끼를 끌고 집으로 돌아 가기를 바라셨을까? 아무튼 왕으로서 입성하시는 예언을 성취하시면서도 그 행사만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말 못하는 짐승에게조차 그 사랑을 보여주신다.
나의 삶 속에서 세상 보기에는 우스꽝스럽고 비효율적인 것 같아도 주님께서 정하신 (God-ordained) 것을 붙잡고 있는가? 왕같은 (왕족) 제사장의 신분으로서 나에게는 나귀 새끼가 있는가? 아니면 남 보기 부끄러워 말씀을 살고 이루는 것 보다는 준마나 쌍두 마차에 더 집착하고 연연하지 않는가?
주님, 왜 이렇게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께 시선을 고정시키지 못해서 그럴 것입니다. 주님을 볼 때 나의 참된 위치가 보임을 고백합니다. 새끼 나귀를 타며 이 땅의 헛된 것을 추구하는 인생을 조롱할 수 있는 풍성한 은혜 주소서. 더 이상 마음 뺏기지 않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