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는 사 56:7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의 말씀을 인용하며 성전의 목적을 상기시키신다. 그리고 그 말씀을 토대로 성전을 청소하신다. 그냥 장사아치들이 모여있는 것이 꼴사나와서가 아니라 말씀을 토대로 성전을 회복시키신다.
성전의 여러가지 업무를 위해서는 매매하는 것이나 환전 등이 필요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것들이 성전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조금씩 조금씩 가까이 오다가 이제는 성전 안으로 완전히 들어와 있다. 그래서 이제는 성전이 성전인지 장사아치 소굴인지 아예 '강도의 소굴'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데, 이것은 유대인 뿐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열려있어 하나님 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즉 그 누구도 와서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 기본과 주된 목적보다는 이제는 그와 상관은 있지만 본질은 아닌 것들이 더 많아지고 본질을 가리게 되었다. 이제 은혜 시대에 성전된 주님의 몸된 교회와 우리 몸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다. 먹고 살고 즐기는 문제가 없을 수 없지만, 이제 주된 목적은 주님과 동행함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리고 그를 누리는 것에 있다.
18-21절의 무화과 사건은 마가 복음에는 성전 청소 상황은 비슷하지만 시간적으로는 조금 다르게 나온다. 그리고 막 11:13에서 무화과를 얻지 못한 이유에 대해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고 말씀한다.
이 사건은 전에 베드로를 꾸짖으신 주님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베드로가 주님에 대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고백하자 주님은 기쁘셔서 바로 교회에 대해서 계시하셨다. 하지만 조금 후 십자가에서의 죽음에 대해 베드로가 만류하자 그렇게 칭찬하셨던 그에게 '사탄'이라고 부르며 호통을 치셨다. 아니 무슨 조울증도 아니고 이랬다 저랬다 하시나..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사탄이라고 부르신 것은 원어가 그대로 '사타나'이다. 이 단어는 마귀를 뜻하는 '디아블로'와는 다른 의미가 있다. 물론 마귀가 사탄이지만, 사탄의 단어적 의미는 '거스르는 자, 대적하는 자'이다. 즉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하신 것은 그에게 '너는 마귀 새끼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너는 지금 나를 대적하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인간적인 연민을 보이지만 사실은 사탄의 모습으로 주님을 대적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무화과 사건 역시 무화과가 열리지도 않는 계절에 무화과를 구하시다 없으니 짜증을 부리며 저주하는 모습 같아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 사건에 대해 무화과 열매가 아니라 열매가 익기 전 조그마하게 오르는 것을 구하셨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배고플 때 그러한 것을 먹었다는..
마가복음은 이 무화과 나무 사건에 대해 '혹' 이라는 단어를 썼다. 없을 것을 아시면서도 '혹시라도' 무언가가 있을까 하셔서 가셨다. 이것은 이 사건이 단지 주님께서 시장하셔서 무화과 나무에 갔다가 아무것도 없으니 짜증냈다는 기록이 아니라 그 던지는 의미가 있다.
만민의 기도하는 집인 성전이 더렵혀지고 그 기능을 잃을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서는 다 자란 열매는 물론이고 그 열매를 열리게 할 그 어떤 징조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잎사귀 밖에 없다. 희망이 없다. 그러한 소망 없는 백성들은 선민이라고 해도 영원토록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저주가 임한다. 소위 구원받았다고 마음대로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성도의 견인'은 우리를 더욱 겸손하게 만든다. '구원의 확신'은 감사하며 그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주님, 소망 없는 나에게 소망의 싹을 주시고 기대하심을 감사합니다. 매일 실패하는 나이지만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소망으로 오늘 하루도 시작합니다. 성령께서 성전된 우리를 채우소서. 영 안에서 기도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