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나라’인줄 알았다. 하지만 주님은 ‘가까이 오는’ 천국 혹은 하나님 나라가 있음을 말씀하셨다. 오늘 포도원 주인과 농부의 비유를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원래 삼으신 백성들은 하나님 보내신 자들을 죽이고 아들까지 죽임에도 열매를 보이지 못했음을 밝히신다.
바울의 소위 ‘이신칭의 (이 단어 역시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칭’이라는 말 때문이다)’는 성경적 뿌리가 분명히 있지만, 주님께서 하신 많은 말씀은 ‘행함’ 혹은 ‘열매’에 비중이 컸다. 그래서 43절에도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고 말씀한다. 이 구절은 매우 새롭게 다가오는데, ‘열매’ ‘맺다’ ‘백성’ 등이 매우 중요한 단어들이다. 먼저 ‘열매’는 말 그대로 열매이고 행위이며 결과이다.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 해도, 하나님의 백성이라 해도, ‘이신칭의’를 붙들고 있어도 ‘그에 합당한’ 열매가 없으면 가짜다. 믿음 보다 행위가 먼저가 아니지만 믿음은 분명 그에 합당한 행위와 열매를 낸다.
‘맺다’라는 단어는 ‘포이에오’라는 단어인데, 정말이지 매우 많이 쓰인 단어다. 그런데 ‘맺다’ 이외에도 ‘행하다’ ‘만들다’ 등 여러 뜻이 있고, 특히 야고보고 전체에서 ‘믿음 (피스토스)’과 ‘행함’을 말하면서 쓰인 단어가 바로 이 ‘포이에오’다. 즉 ‘믿음’과 ‘행함’은 같이 간다. (피스토스는 발음이 ‘삐스또스’로 들리고 포이에오 역시 ‘뽀이에오’로 들린다. ‘삐+뽀’이다. ^^)
물론 여기에도 ‘함정(?)’은 있다. 즉 ‘믿음’이 먼저라는 것이다.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 즉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열매는 그냥 인간의 의지와 우리의 의를 통한 선행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한 복음에는 우리가 참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께 붙어 있어야 함을 말씀하고, 먼저 주님을 믿음으로 그의 생명을 얻고, 그 생명이 우리 안에서 자라야만 열매를 맺는다. 그래서 금방은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마지막 ‘백성’이라는 단어는 정말 이 말씀을 듣는 유대인들의 치를 떨게 할 수 있었던 단어이다. ‘에뜨노스’라는 단어인데, ‘무리, 사람들, 백성’ 등의 뜻으로 쓰였지만, ‘이방인’ 혹은 ‘비신자 pagan’들로 쓰일 때가 가장 많았다. 즉 유대인들 외의 사람들을 뜻한다. 주님께서는 ‘하나님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을 가진 유대인들은 정작 하나님 나라를 빼앗기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대적했던 이방 야만인들이 열매를 맺을 거라 말씀하신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에 대해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이방인들이 들어옴으로 참감람나무 원줄기에 접붙힘을 받는 표현을 쓴다. 그럼으로 원 줄기 몇은 잘리고 그 줄기에 돌감람나무인 이방인들이 접붙혀졌음을 말한다. 그런데 사실 이방인들이 열매를 맺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인 교회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이방인들이 교회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은혜였고, 그래서 열매와는 상관없이 보인다. 하지만 교회로 들어오고 난 후에는 주님의 생명과는 상관없을 수 없고, 그 안에서 자라지 않을 수 없다. 결론적으로 그 생명에 합당한 열매가 요구된다.
주님, 교회 안으로, 하나님의 왕국 안으로, 또 하늘의 왕국 안으로 들어왔음에도 보여드릴 열매가 적음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오히려 더 악해진 제 모습을 볼 때도 있습니다. 주님의 생명이 더 필요합니다. 행함의 열매는 주께 붙어 있을 때 가능함을 압니다. 주위 몇 몇 것들이 저를 침울하게 하고 낙망하게 하지만 우리에게 회개의 영을 주시고 주께서 받으실 만한 열매맺는 백성 삼아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