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지만 가지 않은 것, 그리고 갔지만 예복을 입지 않은 것 모두 왕을 무시한 것이다.  그에 따른 대가가 분명 있는데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는 것과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이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관심을 갖지 않고 그의 부르심을 무시하면 분명 대가가 따른다.

눅 14장에 비슷한 비유가 나오는데, 21절에는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하신다.  청함을 받은 이들이 오지 않자 왕이 대신 먼저 초청한 이들은 이러한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사랑이 많으신 주님은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도 그를 보자 마자 다짜고짜 ‘너 왜 예복 안 입었느냐? 얘들아 당장 이 놈을 포박해서 바깥에 내던져라!’고 하지 않으시고, 우선 ‘친구여’라고 다정하게 예를 갖추어 말씀한다.  그리고 예복을 입지 않은 이유를 물으신다.  혹시라도 다른 문제가 있으면 예복을 갖추어 주시려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정작 그 사람은 아무 말도 못한다.  왕의 예복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왕의 잔치에 초대된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초청을 받았기 때문에 당연히 그들 자신이 예복을 준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잔치에 이미 그들을 위해 예복도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준비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있는데, 자신의 옷이 더 편하고 좋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바로 자신의 의인데, 이러한 의에 대해서는 주님 앞에 서면 아무 말도 못하게 된다.  오직 우리의 예복이신 그리스도를 입어야만 왕 앞에 설 수 있고 그 잔치를 누릴 수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주님은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고 말씀한다.  도대체 이해가 쉽지 않다.  잔치에 참여하고 예복을 입는 것과 청함 혹은 택함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그런데 원어로 보니 조금 다른다.  영어나 우리 말에는 청함 혹은 택함을 ‘받다’ 즉 수동태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잔치에 예복을 입고 참여한 것이 택함을 이미 받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이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원어는 수동태가 아니라 주격 형용사다.  즉 이들이 청함 혹은 택함을 ‘받은’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택함 받은 자들’이다.  즉 예복을 입고 잔치에 참여함으로 그들 자신이 택함 받은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운명론과는 다른다.  운명론은 청함은 받았지만 택함을 받지 못했으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주님께서는 예복을 입지 않은 이들에게도 한 번 더 기회를 주시는 것 처럼, 주님의 은혜 안에서 ‘택함 받은 자’가 될 수 있다.

주님, 시간을 초월한 주님의 택하심은  주의 백성의 복종과 함께 가는 것임을 배웁니다.  주의 택하심을 믿고 택함 받은 자의 정체성으로 주님을 항상 관심하며 음성에 귀기울이기 원합니다.

여기까지 페북에 올린 내용:

어제와 오늘 말씀 모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어제 말씀만으로 족할 것 같은데 주님은 계속해서 그들을 자극하시는 것 같다.  왜 이럴 필요가 있을까?  그들이 단지 위선적이거나 자신들의 권력으로 남들을 압제해서 만은 아닌 것 같다.  23:13에서 그 이유를 엿볼 수 있는데,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라며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에 실패했고, 더우기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것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아예 그들이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을 방해했음을 말씀한다.

갑자기 남들 얘기를 듣고 주식 투자를 따라하다 크게 낭패를 본 사람들이 생각난다.  남들 말을 듣고 따라해서 실패했을 경우 평생 원수가 되는 것으로 여기지만, 영적인 면에서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잘못된 종교 지도자들을 좇았는데 그 결과가 천국이 아니라 불못이라면 얼마나 말할 수 없이 원통할까!  주님은 이러한 점에 대해 엄중한 경고를 하고 계시다.  그래서 주님의 비유는 자극이 아니라 엄중한 경고이고 동시에 사랑의 권유이다.

오늘 잔치의 비유 역시 ‘천국’에 대한 것인데 이 비유도 이해하기 쉽지 않게 들린다.  먼저 왕의 아들의 결혼 잔치에 사람들을 청해서 오라고 했지만 오지 않는다.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 청했지만 이번에는 아예 무시해 버리고 자기 일들 하러 가고 그 몇은 아예 종들을 잡아죽인다.  도무지 이들은 왜 이런 짓을 할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지만 그들이 그랬던 이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당시 주님을 믿지 않던 세대들의 행태가 그랬음을 주님께서는 비유로 보여주신 것이다.  결과적으로 왕은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게 된다.  왕을 무시한 이들에 대한 대가이다.

8절에는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했는데, 아들의 혼인 잔치는 이미 정해졌고 그에 따른 모든 것들이 준비되었지만 원래 청했던 사람들은 합당하지 않았음을 말씀한다.  이 ‘합당’이라는 단어는 ‘가치있다’는 뜻인데, 그들은 잔치에 참여할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결국 네 거리로 가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이들 마다 모두 데려오니 그제서야 혼인 잔치에 사람들이 찼는데, 여기에 또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는 물음에 “그가 아무 말도 못하”자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고 말씀한다.  그냥 읽어보면 이 왕은 좀 고약한 사람처럼 들린다.  아무나 데려오라고 해 놓고 고작 예복 하나 입지 않았다고 손발까지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어 던져야 하나?  그리고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는 저주까지 해야 하나?

그런데 잘 읽어보면 주님은 정말 사랑이 많으시다.  그냥 잔치에 사람 머리 수를 채우려고 초청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눅 14장에 비슷한 비유가 나오는데, 21절에는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하신다.  청함을 받은 이들이 오지 않자 왕이 대신 먼저 초청한 이들은 이러한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이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도 그를 보자 마자 다짜고짜 ‘너 왜 예복 안 입었어? 얘들아 이 놈을 포박해서 바깥에 내던져라!’고 하지 않으시고, 우선 ‘친구여’라고 다정하게 예를 갖추어 말씀한다.  그리고 예복을 입지 않은 이유를 물으신다.  혹시라도 다른 문제가 있으면 예복을 갖추어 주시려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정작 그 사람은 아무 말도 못한다. 

여기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데, 네 거리에서 갑작스럽게 초청한 이들에게 예복이 있을 턱이 없다.  이 모든 예복은 왕께서 준비하신 것이고,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예복을 갖추어 입는 것이 초청한 이에 대한 최소한의 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이를 완전히 무시했다.  선한 자나 악한 자나 잘 생기거나 못 생기거나 원래 좋은 옷을 입었거나 아니거나에 관계 없이 왕의 잔치에 오는 이들은 모두 예복으로 갈아 입어야 한다.  입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손발을 묶여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게 되고,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된다.  왕을 무시한 대가다.

그런데 이에 대해 주님은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고 말씀한다.  어떤 사본에는 이미 20장 16절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바로 후에 이 부분이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두 번째다. 

여기는 올리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