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시대 두 가지 대표 분파가 사두개파과 바리새파였는데, 재미있는 것은 이 두 분파가 서로 충돌은 했지만 그들 모두 성전에서 섬겼다는 점이다.  그래서 레위 지파 중 일부는 바리새파, 또 다른 일부는 사두개파였는데, 그렇다고 바리새파나 사두개파가 모두 레위 지파는 아니었다. 

사두개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영적인 세계나 사후 세계 혹은 부활 등을 믿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이, 그들은 모세 오경만 문자적으로 믿었고, 바리새파와는 다르게 ‘구전 오경’ 즉 모세 오경에 여러 구전 되어온 탈무드 등이나 전통은 인정하지 않았다.  사실 구약의 여러 말씀에서는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면 안전하고 배부르고 세상에서 뛰어난 민족이 되게 하시겠다는 말씀이 대부분을 차지 했기에 주님의 부활 혹은 영생의 개념은 아마도 그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제 말씀을 통해 모세 오경을 문자적으로 믿는 그들에게 출애굽기 말씀을 통해 영적으로 새로운 도전을 주셨다.

오늘은 바리새인들의 시험인데, 바리새인 중에 ‘한 율법사’가 시험한다.  즉 법에는 도통한 사람인데, 그의 질문에는 바리새인들의 모든 통합적 사상이 배어있다.  구약 성경과 더불어 수 많은 구전과 탈무드의 명령 가운데 과연 어떤 계명이 크냐 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특히 신명기에 많이 나오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시고 이것이 첫째되는 계명이며, 둘째도 레 19:18 의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며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맺으신다.  이 답변은 놀라운 것인데, 그 이유가 물론 지금 우리에게 교훈하는 면도 중요하지만, 사실은 이 대답이 바리새인들을 만족시켰다는 점이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사회 유지나 정치적인 개념으로만 여겼던 사두개인들과는 달리 하나님과 사람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그래도 열심히 고민하는 분파였다.

먼저 하나님을 우리 온 존재를 다해 사랑할 수 있다면, 그리고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을 나 자신 처럼 사랑할 수 있다면 그 외의 것들은 부수적인 것이 된다.  하나님을 먼저 진정으로 사랑하면 그 사랑은 자연적으로 그 앞에서 나 자신의 무지와 한계를 보며 그대로 용납하고 사랑하게 되고 그 같은 사랑은 역시 옆 사람으로 흐른다.  그래서 둘째도 ‘그와 같다’.  이 하나님으로부터 우리 안에 흐르는 사랑은 다른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것 처럼 이 사랑은 위에서 흘러 우리 안으로 돌아 주위를 적신다.  그 시작은 먼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을 만족하게 한 이 대답은 실제적으로는 그들에게 부담이 되었을 수도 있다.  지금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것이 현실에서는 정말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반격하신다.  그리고 도전하신다.

‘너희들이 자꾸 나에 대해 의심하는데, 너희들이 생각하는 메시야는 누구냐?  누구 자손이냐?’ 그러자 그들은 ‘다윗의 자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주님은 ‘그렇다면 다윗은 왜 자기 후손에게 주님이라고 부르느냐?’고 도전하신다.  사단이 말씀으로 시험했을 때 주님께서도 말씀으로 답하여 이기신 것 처럼, 그들 ‘율법도사’들에게도 말씀으로 도전하여 이기신다.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고 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성경에 무지한지 깨닫게 된다.  나 역시도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에 얼마나 그냥 건너 뛰는지.. 그리고 성경을 좀 안다고 생각하는지…  바리새인들은 구약을 열심히 연구는 했지만 성육신 사건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는 다윗 처럼 하나님의 영으로만 가능하다.

주님, 오늘 아침에도 사람을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배려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충분히 흐르지 않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먼저 내 안에 주님의 은혜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지 않고는 하나님도 이웃도 나 자신도 사랑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또 성령이 아니고서는 주님을 알 수도 없음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흐름으로, 또 성령께서 계심으로 이 모든 것이 내 삶 속에서 가능하고 또 경험할 수 있고 살아낼 수 있음을 믿습니다.  오늘 내 안에 충만하소서.  주님 보시는 눈으로 나를 보게 하시고, 주님 얼굴로 이웃을 대하게 하소서.  생명의 성령이 흐르소서.  사랑의 강이 넘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