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개인의 죽음이든 온 지구상에 임하는 종말이든 모든 것의 끝은 있다.  그리고 그 끝은 그냥 끝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변함없을 새 하늘과 새 땅의 시작이다.  이러한 종말을 정말 믿는 다면 지금 이 세상에서 불평이 많이 줄어든다.  아이들이 조금 공부를 소홀히 해도, 옆 집이 조금 더 잘 살아도, 내가 사는 것에 현실적인 즐거움이 별로 없어도 종말이 있음을 믿는 한 위로가 된다.  그래서 살전 4:18에도 이러한 것으로 인해 ‘서로 위로하라’고 권한다.

하지만 그래도 현실을 살 수 밖에 없는 인생에게 현실은 실제이고 그 실재이다.  물론 이 그림자 같은 세상 살이에 비하면 진리로서의 실제 혹은 영적 현실은 분명 있지만, 육신을 갖고 사는 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래서 각자 맡은 바 더욱 열심히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건강한 종말론적 신앙이 필요하다.

이세돌 대 알파고 대국에서 이세돌의 패배는 시사하는 점이 크다.  물론 이제까지 체스 대국에서는 1996년 딥 블루 이래 컴퓨터가 여러 차례 사람을 이겼지만, 체스 보다 훨씬 더 경우의 수가 많은 바둑 만큼은 컴퓨터가 인간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했어도 그것은 상식적으로 시간 문제일 수 밖에 없었다.  스티븐 호킹은 “인공지능은 스스로를 개량하고 도약할 수 있는 반면, 인간은 생물학적 진화 속도가 늦어 인공지능과 경쟁할 수 없고 대체되고 말 것”이라고 했다는데, 그러면 결국 재앙이다.  계시록의 예언이 훨씬 앞으로 다가오고 현실화 되가는 느낌이다.  계시록에는 ‘짐승’이 권세를 받아 말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말’을 하는 능력과 권세를 부여 받는 것은 창조의 능력과 비교되는 대단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 ‘시리’ 등의 개발로 우리 일상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어떤 이들은 베리칩이 짐승의 표라고도 하고, 다른 이들은 아니라고 한다.  베리칩 혹은 그 대체적인 어떤 것이 반드시 짐승의 표라 주장 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결코 짐승의 표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도 상대적으로 문제가 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베리칩을 받아도 (베리칩이 짐승의 표라고 할 때) 구원에는 문제가 없다고도 말한다.  그래서 ‘예수 믿는’ 다는 말이 이제까지 너무 오용되어 왔다는 느낌이다.  믿음은 소망을 유발하고 소망으로 인해 ‘끝까지 견디는’ 것이 가능하다.

주님, ‘끝까지 견디는’ 것은 고사하고 오늘 하루 몇 시간도 채 견디지 못하고 안달하며 현실의 여러 문제에 부딪히며 좌절하는 저를 봅니다.  이러한 기질에서 저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믿음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