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도 유명한 달란트 비유다. 먼저 달란트에 대한 오해를 풀어야 한다. 많은 경우 달란트를 노래를 잘하거나 두뇌가 뛰어나거나 그 외에 여러 재능으로 이해해서, 그러한 것을 잘 개발해서 무언가 이루어 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전혀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달란트는 ‘타고난 재능’이 아니라 우리의 천연적인 어떠함과는 전혀 관계없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이다.
달란트는 보통 두 가지인데, 그 무게가 시대에 따라 변했지만 보통 금이나 은 덩어리를 뜻한다. 금 달란트일 경우 그 가치는 요즘으로 환산해서 약 100 - 125만불 정도이고, 은으로 환산했을 때 약 만6천불 정도가 된다 (위키). 달란트가 금이라면 변치 않는 하나님의 속성을 의미한다. 그런데 27절의 ‘돈’은 원어로 ‘아르구리온, 은’을 뜻한다. 은의 뜻은 시 12:6에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라는 구절처럼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이러한 달란트를 주인은 ‘종들’에게 주셨다. 자신의 자녀들이나 아내나 이웃에게 빌려 준 것이 아니라 그의 노예들에게 주셨다. 즉 이 비유는 주의 종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의 종들에게 그들의 ‘능력대로’ 나눠 주셨는데, 이 능력은 유명한 단어 ‘두나미스’이다. 즉 하나님께서 일을 맡기실 때 모두에게 동일하게 맡기지 않으시고 타고난 능력 혹은 성장하며 취득한 능력대로 일을 맡기신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종들은 ‘바로 가서’ 그들의 받은 만큼 남겼고 그것에 대해 후에 주님께서는 칭찬하신다. 두 달란트 받은 이에게 다섯 달란트를 요구하지 않으신다.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여 충성되게 섬겼다. 19절에는 시간(크로노스)이 많이 흐른 후에 주께서 돌아 오시는데, 주의 재림이 바로 있지 않을 것을 미리 말씀하셨다. 21, 23절에는 충성된 종들이 ‘많은 것을 다스리고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되는데, 결과적으로 다섯 달란트를 받은 이나 두 달란트를 받은 이나 같은 상을 받는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이는 분명 한 달란트의 능력이 있음에도 다른 이들과 같이 바로 가서 달란트를 불리지 않고 땅에 숨겨 두었다. 이것은 하늘에 속한 것을 땅에 묻은 것이고, 마치 달란트가 없는 것 처럼 산 것인데, ‘주의 종’이라는 타이틀 혹은 정체성이 있음에도 하나님 말씀을 ‘바로 가서’ 불리지 않고 마치 없는 것 처럼, 받지 않은 것 처럼 사는 이들이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장농이나 금고에 숨겨두지 않고 ‘땅을 파고 감추어 둔’ 것은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을 저속한 이 땅에 남겨둔 것과 같다.
이 한 달란트 받은 이에 대해 특히 그의 대답이 주인을 화나게 했는데, 그는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라고 대답했다. ‘굳은’이라는 말은 원어로 ‘스켈레로스’이며 어원은 ‘스켈로스 (다리)’인데, ‘냉혹하다, 가혹하다’의 뜻이다. 24절과 26절 ‘알았으므로’, 또 ‘알았느냐’는 ‘에이도’ 라는 단어로, ‘인식하다’의 뜻인데, 이 악하고 게으른 종이 이렇게 했던 이유는 주인에 대한 그의 의식 즉 Lordship이 잘못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을 아주 냉혹한으로 오해했고, 그래서 두려웠고, 종으로서 그의 섬김이 아무 쓸모 없을 거라는 허무주의적인 사고방식이 있었다. 아… 얼마나 우리는 주님에 대해 오해가 많은가..
재미있는 것은 ‘취리하는 자들’을 언급하시는데, 원어는 ‘트라페지테스’로 그 어원은 ‘트라페자 (책상)’ 영어의 ‘프라페조이드 (사다리꼴)’과 연관이 있다. 환전하는 이들이 상을 펴놓고 돈을 바꾸고 수수료나 이자를 지불하던 것에서 유래한다. 만일 달란트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이렇게 말씀을 맞겨놓고 ‘이자’를 받을 수 있는 ‘책상’은 어딜까? 재미있는 것은 ‘이자’라는 단어인 ‘토코’는 원 의미가 ‘출생’이다. 무언가 생산하고 자손을 낳는 것인데, 이러한 개념에서 마치 돈이 ‘새끼치기’ 하는 것의 의미를 품고 있다.
현실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그 받은 만큼 불릴 수 없을 때 ‘원금’과 ‘이자’를 얻을 수 있는 ‘책상’은 어디인가? 바로 교회 혹은 형제 자매들간의 나눔터이다. 전문적으로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고 연구할 수 없을지라도, 적어도 받은 말씀에 대해서 서로 나누고 은혜를 공유할 수 있다. 거기에서 은혜는 그 원금이 보존되고 또 ‘새끼친다’. 자신의 능력과 받은 달란트가 적다고 걱정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다.
누구든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면, 그 받은 바 본질은 금이고, 따라서 그는 백만장자이다. 금과 은의 가치적 차이는 크지만 그 원 의미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속성이고 주님의 말씀이다. 나보다 큰 사역을 감당하는 이들의 달란트가 커보이고 부럽게 느껴지지만, 나는 내가 받은 만큼만 남기면 ‘많은 것을 다스리고 주의 기쁨에 참여하는’ 동일한 상을 받는다. 주님께서는 눅 12:48에서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처럼 능력이 많은 이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하신다. (능력이 그리 많지 않아 다행이다. ㅎㅎ)
주님, 주의 종의 받은 바 달란트는 주의 어떠하심이고 거룩한 말씀임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나누어야 하는데, 나누기 위해서는 먼저 그대로 살아야 함을 압니다. 그대로 살지 못함에 죄송합니다. 주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얼마나 죄를 미워하시는지, 하지만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오래 참으시는지, 얼마나 풍성하시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주시기 기뻐하시는지 더 알게 하소서. 우리가 아는 만큼 주님을 사랑할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나 받은 달란트를 알게 하시고, 주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 내 능력이 보잘것 없다면, 주의 크신 능력으로 채우소서. 백만장자로서 당당히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