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과 염소의 비유의 핵심은 믿는 이들이 여섯 가지의 착한 일을 해야 한다는 것 보다는 먼저 양으로 태어나야 그러한 것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염소의 생명을 가지고서는 결코 그러한 착한 일을 할 수가 없다.  둘이 비슷하게 생기고 울음 소리도 흡사하지만 그 나타나는 생활은 큰 차이가 있는데, 그 이유는 생명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나타나는 생활에서 역시 양인지 염소인지 구분할 수도 있다.  양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주장해도 생활에서 착한 것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생명을 확인할 길이 없다.  또 한 면으로는 분명 양으로 거듭난 경험이 있어도 많은 때 염소의 어떠한 것이 자꾸 튀어나온다.  그래서 자아가 죽어야 한다.  자아가 죽지 않으면 서로 치고 박고 싸울 뿐이다.  천국이 되어야 할 가정과 교회가 지옥이 된다.  아무리 말씀을 많이 듣고 기도를 많이 해도 자아가 죽지 않고 염소의 생명이 더 세지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없다.

그런데 34절에는 좀 재미있는 구절이 있다.  31절에는 ‘인자’로 시작하지만, 주님께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때 심판주 ‘임금’이 되신다.  주님께서는 양들을 칭찬하시는데, 개정에는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라고 되어있지만, 원어에는 과거완료 형으로 이미 ‘복받은 자들’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는 부분인데, 양들이 ‘상속’받는 ‘왕국’은 ‘창세로부터 예비된’ 것이다.  이 땅에 주님 오심으로 이미 천국이 임했지만, 천국이 온전히 드러나는 것은 시간적으로 바로 이 때가 된다.  믿는 이들 자체는 이미 ‘창제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았는데 (엡 1:4), 믿는 이들이 상속 받을 이 ‘왕국’은 ‘창세로부터 예비된’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창세 전에 미리 그의 백성들을 택하시고, 그들이 상속 받을 왕국은 창세로부터 준비하셨다.

여섯 가지의 착한 일이 열거 되는데,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줌.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함.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함.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힘.  병들었을 때에 돌봄.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봄 등으로, 그 핵심은 이러한 일을 당하는 이들과 주님을 동일하게 여긴 것이다.  즉 행함 이전에 이런 이들에 대한 측은함이 먼저이고, 단지 한번 혹은 몇번 행한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관계를 세우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고 행하는 것은 자선 사업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세상의 사회 안전 혹은 보장 제도와는 다르다.  주님께서는 단지 어려움에 당한 자들을 돕는 것을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행하는 것이 곧 당신을 섬기는 것과 동일함을 말씀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여섯 가지 목록도 중요하지만 그 외 여러 다른 것들 안에서도 다른 이들을 섬기는 것이 마치 주님을 섬기는 것처럼 된다면 양의 생명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좀 궁금한 것이 있다.  41절에는 염소들이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는 것을 말씀하는데, 어제 말씀 30절에는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고 기록한다.  ‘영원한 불’은 물론 계시록의 불못이지만, 30절의 ‘바깥 어두운데’는 어디고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는 것은 언제고 언제까지 일까?  계시록에도 이 둘 모두를 볼 수 있는데, 21:8에는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하고 22:15는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고 기록한다.  이 둘이 같은 것 같아 보이지만 잘 모르겠다.  아무튼 이 둘은 피하면 좋겠다.  주님 주신 생명으로 양의 삶을 살아야 한다.

 46절 마지막 절에는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고 기록하는데, ‘영벌’의 반대가 ‘영상’이 아니라 ‘영생’이다.  영원히 벌을 받으려면 영원히 살아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벌받기 위해 살아 있는 것은 영생이 아니다.  그래서 ‘영생’이라는 말은 그냥 시간적으로 살아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요 17:3에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는 주님의 기도처럼, 영생은 아버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즉 하나님과의 관계요 연합이다.

주님, 그 날에 주님의 오른 편에 서야 할텐데요.. 저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시며, 저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뜻을 사랑하며 순종할 수 있게 주의 생명으로 더 채워 주시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