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절은 개역 번역이 좀 아쉽다.  ‘아무에게 가서’라는 말이 마치 ‘누구든지 만나면’ 이라고 들리지만, 이 단어 ‘deina 데이나’는 ‘아무개’ 혹은 ‘누구누구’라는 뜻이다.  주님께서는 능력이 많으시지만, 이런 일조차 ‘매지컬’하게 하시지는 않는다.  (‘매직’이라는 단어가 사실 영적으로는 좋은 것이 아니다.  라틴어 magice 혹은 헬라어 magike에서 온 말인데, 말 그대로 마법, 점술 등이라는 뜻이다.  기독교 내에서도 이런 마법 혹은 점술 등에 가까운 이벤트를 하는 것을 볼 때면 화가 난다.)

23, 24절에는 ‘나를 팔리라’ ‘인자를 파는’ 이라고 번역했는데, 영어 번역본 거의 모두에서는 betray 즉 ‘배반하다’로 되어 있고, 다른 곳에서는 ‘one who hands me over’이라고도 되어 있다.  이 원어는 ‘파라디도미’로 ‘넘겨주다, 쓰도록 하다, 배반하다, 주다, 포기하다’ 등의 많은 뜻이 있는데, 돈을 주고 판다는 뜻은 사실 없다.  흥미로운 것은 ‘넘겨주다’의 뜻도 있지만 ‘포기하다’의 뜻도 있다.  주님을 ‘팔아 넘기지’ 않아도 그를 마음에서 포기한다면 배반하는 것이 된다.

주님께서 '제자 중 한 사람의 배반'을 말씀하시자 22절에 모두가 ‘(혹시) 저 인가요?’ 라고 질문할 때 23절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고 대답하시는데, 마치 ‘우연히 먹다가 나랑 손이 동시에 그릇에 들어가는 자가 나를 팔리라’로 들리지만, 원어를 보니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이 부분에서 시제가 좀 복잡한데, 23절 동사 모두 아오리스트로 되어 있지만 ‘나를 팔리라 (배반하리라)’ 부분은 미래형으로 되어 있다.  영번역 MSG에서는 ‘Jesus answered, "The one who hands me over is someone I eat with daily, one who passes me food at the table.”’로 번역했다.  즉 ‘그 당시 음식을 먹던 때’ 만이 아니라 ‘나를 배반할  사람은 나와 매일 먹는 사람, 나에게 음식을 전달해 준 사람이다’ 혹은 (당시 관습대로) ‘나와 함께 (음식을) 찍어 먹는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의 의미가 있다.

물론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아오리스트로 썼을 수도 있고, 또 24절에서 가룟 유다에 대해 한탄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가룟 유다임을 분명히 하지만, 이 구절은 오늘날 말씀을 읽으며 주님과 교제하는 이들, ‘나와 매일 먹는 사람’ 중에도 배반자가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을 보게 한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감사하게도 가룟 유다까지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며 기회를 주신다. 

요 13:1에는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기록하는데, 가룟 유다가 ‘자기 사람들’ 중에 하나일지는 모르겠지만, 25절에 유다가 자신은 아닌가고 물을 때 주님께서 “네가 말하였도다”고 일러 주시면서 회개할 것을 제시하신다.  그때 다른 제자들에게 ‘바로 이놈이다.  빨리 잡아서 나를 팔지 못하게 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계속 참으시며 기회를 주시며 포기하지 않으신다.  더우기 주의 만찬에까지 계속해서 가룟 유다를 합석시키신다.

포기하지 않으시는 그 사랑이 이 아침에 새롭다.  우리는 주님의 손을 잡아도 주께서는 우리의 손목을 잡으시기에 우리가 실족함으로 손을 놓아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손목을 굳게 잡아 주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사랑에 힘입어 나도 주님을 포기할 수 없다.  가끔 하나님께 삐질 때도 있지만 그렇게 삐질 수 있는 것도 아마 주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시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일 것 같다. ㅎㅎ

 

일상을 통한 성찬 (26-30절)

아… 성찬이다.  성찬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많다.

26절에는 ‘그들이 먹을 때에’로 시작하는데, 영어에는 ‘during the meal’, 헬라어에는 현재 진행형으로 되어 있다.  즉 이 말은 소위 말하는 ‘애찬’을 다 끝내고 ‘성찬’이 있다거나, 혹은 ‘성찬’을 먼저 하고 ‘애찬’을 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냥 먹는 도중에 갑자기 ‘성찬’을 행하셨다는 뜻이다.  ‘성찬’과 ‘애찬’을 많이들 구별하지만, 개인적으로 그 차이를 발견하기 힘들었다.  보통 ‘애찬’은 성도들이 함께 사랑함으로 음식을 먹는 것이고, ‘성찬’은 빵과 포도주로 격식을 갖추어 하며 그 인도를 목회자나 사제가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주님은 어떤 특별한 음식을 따로 마련해서 ‘성찬’을 행하시지 않고 그냥 음식을 드시는 중에 같은 빵과 같은 포도주로 축복하시고 떼어 주시고 또 잔을 부어 주셨다.  이것은 고전11장 바울이 성찬에 대해 말한 것에서 더욱 확실해 지는데,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 한 자리에 모여 하는 성찬은 애찬과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물론 문제가 드러나기도 하고 아마 그래서 그 둘을 나누게 됐는지도 모르지만, 주님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음식 문화가 다른 우리들에게는 그대로의 적용이 힘들지 몰라도,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애찬 음식과 성찬에서 먹는 음식이 결코 다를 수 없었다.  이것은 결국 우리에게 주님이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이심(요 6:55)을 지속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그렇기에 쌀밥을 주식으로 하는 우리에게도 매일 먹는 음식에서 성찬의 의미를 찾아야 하며,  할 수만 있다면 매일 각 가정에서도 성찬을 해야 한다.  사람이 빵 혹은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께서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되시며, 주님으로 사는 것임을 일상의 식탁을 통해서도 경험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찬은 한 달에 한번 하거나 혹은 일년에 네 번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해야 하는 것이고, 다락방 모임에서도 할 수 있어야, 아니,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다.  다락방 리더를 ‘작은 목사’로 기분만 띄워줄 것이 아니라, 그러한 권위도 부여해야 한다.  혹 이단으로 빠지면 어떨까 염려할지 몰라도, 성찬을 하는 이들이 이단에 빠지겠는가, 아니면 성찬을 하지 않는 이들이 이단에 빠지겠는가?  (이런 나눔을 올리는 나도 이단으로 생각할지도.. ㅎㅎ)

주님,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을 우리도 포기하지 않기 원합니다.  제자들도 곧 주님을 버리고 부인했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몸과 피를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로 주와 연합하며 또 주님의 몸으로 하나가 되게 하셨음을 봅니다.  2천년 전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지만, 이것이 오늘 현재에도 생생히 살아 있는 실행이 되는 이유는 바로 주님께서 살아계시며 우리로 주의 몸 되게 하셨음임을 압니다.  오늘 저녁 시간이 주의 만찬 되게 하소서.  하루라도 주님을 먹지 못하면 살 수 없음을 인정함으로 오늘도 주의 살을 먹고 주의 피를 마시는 자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