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에서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려고 모였던 때는 ‘새벽’이 아니라 ‘이른 아침’을 뜻하는 ‘프로이아’다. 이 단어는 ‘새벽’을 뜻하는 ‘프로이’에서 온 말인데, 마리아가 주님 부활 후 무덤에 갔던 시각에 쓰인 단어가 ‘프로이’ 즉 아직 어두운 새벽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의 목적을 위해 일찍 모이지만, 주님의 부활은 그보다 먼저이다. 또 부활의 주님을 맞는 이들 역시 동트기 전에 일어난다. 새벽기도가 종교성을 벗어버리고 정말 매일 아침 부활하신 주님을 맞는 시간이 된다면 매일이 부활절이 될 것이고 우리의 영은 아침마다 부흥할 것이다. 그래서 아침 큐티를 통해서도 개인적으로 주님을 추구할 수 있다.
3절에는 의아한 구절이 있다. 바로 유다가 ‘스스로 뉘우쳐’라고 된 부분인데, 영어 킹제임스역에서는 repent 즉 ‘회개’라고 번역을 했다. 그런데 원문은 ‘메타멜로마이’로 ‘후회하다’의 뜻이다. ‘회개하다’의 원어는 ‘메타노에오’이고 ‘노에오’는 ‘생각, 인식, 이해’ 등의 뜻이며 ‘메타’는 ‘함께, 후에, 다음에’ 등의 뜻이다. 즉 참된 회개는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그런데 후회하는 것은 같은 ‘메타’로 시작하지만, ‘멜로마이’의 원형 ‘멜로이’는 ‘걱정하다, 후회하다, 돌아보다’ 등의 뜻이다. 안타깝게도 유다가 했던 것은 ‘회개’가 아니라 ‘후회’였다.
후회로 끝나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찬송 343장 ‘울어도 못하네’가 생각난다. 울어도 못하고 힘써도 못하고 참아도 못하지만 후회도 역시 소용없다. 아.. 왜 유다가 안타까울까.. 많은 인생들의 모습, 나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마도 옛날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 유다를 그렇게 부각시켰나보다.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인본주의적 발상이다. 후회해도 할 수 없다… 회개까지 가야한다.
유다는 후회라도 했지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 조차도 없었고 책임을 회피한다. 대제사장들은 책임을 회피하지만 그들의 종교성은 결코 놓치 않는다.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은 것은 알았지만 왜 주님의 피가 필요한지는 몰랐다. 정말이지 주님께서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당하’신 것도 아니고, 유다에 의해 팔리신 것도 아니고, 그 백성, 특히 당시 권력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다. 하지만 결국 모든 인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죽으셨다. 나로 인해 죽으셨다…
그런데 왜 하필 토기장이의 밭일까? 물론 예레미야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도 있지만, 토기장이의 밭은 나로 조금 생각해 보게 한다.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들의 무덤으로 삼았는데, 정통 유대식 무덤은 굴에 돌로 막아 놓는 형태지만, 나그네가 죽었을 때는 그냥 땅에 묻었던 것 같다.
이것은 ‘너는 흙으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창세기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는데, 원래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고 하나님을 닮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죄를 짓고 타락 후 인간에게는 사망이 임하게 됐고, 결과적으로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인류는 모두 ‘흙으로 돌아가는’ 무의미하고 소망없는 인생의 결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토기장이’에게서 소망을 본다. 주님은 부활하셨고,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의 ‘토기장이’시다 (롬 9:21). 인생은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 운명이지만, 주님을 믿어 그의 생명으로 거듭나면 하나님께서는 더럽고 연약한 질흙으로 영광스럽고 귀한 그릇을 만드신다. 그분의 목적을 위해 쓰신다.
주님,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저주의 말씀은 지나고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서 이제는 우리가 주님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심을 입은 것을 봅니다. 주님의 손으로 빚어진 우리들 주님의 걸작품으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소서. 유다의 후회와 종교인들의 종교성들을 모두 벗어 버리고, 주님 앞에 이 아침에도 돌아옵니다. 부활의 능력과 그 영광을 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