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권세와 능력은 다 어디로 가고 주님은 묵묵히 십자가형을 받으신다. 온갖 모욕과 조롱과 희롱을 다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신다.
34절에는 ‘쓸개 탄 포도주’라고 되어 있는데, 원어에는 ‘쓸개 탄 식초’로 되어 있다. 아마도 어떤 마취제 역할을 했을 것 같다. 당시 잔악한 십자가형을 받는 이들에게 그래도 인간적인 대우를 해주는 단 하나의 마지막 배려였는지 모른다. 그 맛이야 시고 쓰겠지만, 고통을 덜어주는 약이 된다. 하지만 주님은 거부하셨다. 아마도 옆의 두 강도들은 그것을 받아 마시고 고통을 피하려 했겠지만 주님은 고통을 모두 감내하시기 원하셨다. 가끔 내가 십자가를 진다고 생각할 때, 그 힘듬과 고통에 대한 보상 혹은 마취제로 편함과 즐거움을 동시에 찾게 된다. 오락을 한다거나 기호식품을 찾는다거나 하는 것으로 내 마음과 육신을 위로한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그러한 것은 십자가를 온전히 지는 것이 아니다. 그 고통을 온전히 감내해야 한다.
구레네 시몬이 등장한다. 요한 복음을 제외한 공관복음에는 모두 기록된 인물이고, 주님의 십자가가 억지로 지워지게 됐는데, 후에 롬 16:13에는 바울이 시몬의 아내를 자신의 어머니라고 부르게 되는, 그의 가정은 영광스런 믿음의 가문이 되었다. 살면서 겪는 고통과 고난이 모두 십자가는 아니다. 사실 우리의 잘못과 실수 그리고 욕심 때문에 겪는 고난과 고통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겪는 억울함과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대우, 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 암울함은 나에게 주신 십자가일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우리로 십자가를 억지로 지게 하심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깨우치신다. 당시에는 힘들고 후회되고 어쩌면 짜증을 부릴 수도 있지만, 후에는 영광이 되고 자랑이 된다. 나는 나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하지만, 주님께서는 주님의 십자가를 지는 경험으로 인도하실 수도 있다. 나의 자아를 해결하는 나의 십자가에 비해, 주님의 십자가는 다른 이들을 위한 십자가이다. 주님의 십자가의 구속은 온전하지만, 구레네 시몬처럼 거기에 우리를 동참하게 하시기도 한다.
십자가 자체는 잔인한 형틀이다. 그래서 보석박힌 십자가 장신구는 십자가에 대해 제대로 말해주지 않는다. 십자가는 철저히 실패한 인생의 결말이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도 수치와 실패로 보인다. 사람들은 주님을 조롱하고 모욕하지만 거기에 대해 답답하게도 시원한 대답을 해 주시지 않는다. 하지만 십자가는 생명의 부활로 (요 5:29) 이끈다. 부활이 없다면 십자가는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다. 그래서 십자가는 승리다. 믿는 이들의 삶이 그리 멋지게 보이지 않는다면 아마도 그것이 정답일 수도 있다. 주님의 십자가처럼 믿는 이들 역시 실패한 인생으로 보이는 십자가 인생이라면 거기에는 생명의 부활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님, 십자가의 도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내 옆을 보아도, 나를 보아도 십자가를 지는 이들을 찾기 힘듭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거부할 때 주님은 주의 택하신 이들을 생명의 부활로 이끄시기 위해 억지로 십자가를 통과해야 하는 환경으로 몰아 주시기도함을 알게 하소서. 그 십자가를 온전히 감내할 수 있도록 부활의 소망으로 충만케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