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3시간 동안 그 땅에 어둠이 깔렸다. 이것은 일식일까? 일식이라면 이렇게 오래 시간을 끌지 않는다. 일식과 동시에 지구의 자전과 달의 공전이 잠시 멈춘 것일까? 과학이 발달한 오늘 날에 한번 연구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하다.
신약에서 가끔 나오는 아람말이 이번 장에서 나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의 의미라고 했는데, 이제껏 그 해석이 분분한 논란이 되는 말씀이다. 삼위에 대해 혼란을 겪게도 하고, 주님께서는 왜 이런 말씀을 하셨나 궁금하게도 하는 신비스러운 부분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특이함 점이 있다. 주님께서는 한번도 당신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부르시지 않았었다. 주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독생하신 아들이시기에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한 생명이심으로 하나님은 항상 아버지시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는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으시고 하나님이라고 부르신다. 그리고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는 ‘도대체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라는 섭섭함을 토로하는 것 처럼 들리고 그런 의미도 없진 않겠지만, 그만큼 주님은 하나님에 의해 철저히 버림 받으셨음을 복음서를 읽는 이들에게 분명히 증거하시는 말씀이다.
아.. 이것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이때 만큼은 주님의 신성은 사라지고 인성만 남은 것인까? 그렇지 않다. 하지만 주님은 이 부분에서 만큼은 온전히 순전한 제물인 어린 양의 모습을 취하셨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 구약의 제사에서 순전한 어린 양을 바치는 것 처럼, 주님은 온전히 버림 받아야 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주님께서 철저히 버림 받으셨다는 것은 반대로 우리는 철저히 용납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구속’, 즉 ‘구해서 속했다’ 혹은 redeem이라고 한다. 주님의 단번에 자신을 드리심과 죽으심, 값을 지불하심으로 온 인류는 하나님 아버지께 ‘다시 사오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히 4:16).
이렇게 인성이 부각되는 현장에서 주님의 신성은 더욱 빛을 발하는 기록이 있는데, 50절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의 원어를 보면 ‘영혼’이 아니라 ‘영’이 떠났다. 사람들은 죽으면 모두 ‘혼’이 떠난 것으로 성경은 항상 기록하지만, 주님의 죽으심만큼은 ‘영’이 떠나셨다고 기록한다. 주님의 신성은 변하지 않는다. 더우기 바로 다음 51-52절에는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라고 기록하며 주님의 신성을 확증한다.
성소 휘장 뒤의 지성소에서 비밀스럽게 숨어 계셨던 것 같은 하나님은 이제 더 이상 비밀스러운 분이 아니라 거기에서 나오셔서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시는 분이 되셨다. 찢어진 성전 휘장이 후에는 보수 되었었겠지만, 성전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 자체는 구약의 경륜을 완전히 뒤집은 경악할 사건이다. 휘장이 찢어짐으로 지성소가 드러난 것 같이, 그리스도의 찢겨진 몸을 통해 우리는 아버지께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고 기록하는데, 이들은 후에 어떻게 됐을까? 왜 마태는 이부분을 기록했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 처럼 다시 죽었을 것이다. 참된 부활은 주님 재림 때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님의 십자가 죽음은 그냥 실패한 한 인물의 허무한 죽음이 아니라 죽은 이들을 한동안 일으키게 할 만큼 막강한 구속의 능력이었음을 증거한다.
이러한 모든 일에 대해 객관적인 관찰이 가능했던 이방인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은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한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주님은 아들 하나님이시다! 주님의 죽으심은 그의 신성을 더욱 확인시켜 준다.
주님, 가끔 경험하는 사망의 느낌은 주님과 멀어졌을 때임을 고백합니다. 죽어도 주님과 함께라면 주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시듯 그 능력이 넘칠 것을 믿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연합으로 회복시키시고, 유대인과 이방인의 막힌 담을 허물으셨듯이,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소서. 주님의 죽으심은 헛되지 않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