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등장하는데 마태는 그가 부자임을 말한다. 더우기 부자만이 아니라 그는 제자라고 기록한다. 주님 말씀에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 구멍을 통과하는 것에 비유하셨는데, 이 요셉은 부자면서 제자다. 이 짧은 구절은 부자 그리스도인들에게 소망을 준다.
현실적으로 부자는 누구일까? 보통 돈이 많은 사람을 부자라고 한다. 돈이 많은 것은 동시에 돈의 힘을 소유한 것이고, 그러한 재물을 마음대로 움직이고 또 쓸 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부자처럼 보이는 이들 중에 자신의 재물을 원하는 때에 움직이지도 또 쓰지도 못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어떤 경우 자신 소유의 부동산 때문에 세금 문제로 오히려 빚을 지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자는 재물이 많은 것도 중요하지만 그 재물을 자신의 의사대로 언제든 움직이고 사용할 수 있어야 진정한 부자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냥 부자로 끝나지 주님의 제자가 될 수는 없다. 주님의 제자로서의 부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부에 대해 청지기 자세를 가진 사람이다. 눅 23:53에는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라고 기록하는데, 아리마대 요셉은 자신의 부로 주님의 장지를 구별하여 구입했다. 어찌 보면 이것도 옥합을 깨뜨린 여인들 처럼 '허비'한 것일 수도 있다. 3일 밖에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의 사회적 지위와 부를 생각하면 요셉은 매우 큰 모험을 하고 있다. 만일의 경우 주님의 몸의 행방에 대해 그가 뒤집어 쓸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교회에 부자들도 필요하다. 다만 자신의 물질을 하나님보다 더 섬기거나 그 힘에 의지하거나 혹은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가 쓰시고자 할 때 언제든지 자신의 재물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참된 부자 제자다. 갑질하는 부자는 비난받지만 겸손히 주를 섬기는 부자는 존경받는다.
말씀이 능력이 되지 않는 이유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 당신의 부활을 수 없이 말씀하셨지만 정작 그 말씀을 믿고 기억했던 제자들은 없었다. 이것은 정말 어처구니 없는 것인데, 주님의 말씀을 이렇게 걸러 듣는 것이 나에게도 많이 있다. '아'라고 말씀하시지만, 내 귀에 들어오면서 그것이 '어'로 바뀐다. 주님이 부활하시고 그 말씀을 상기시키시자 비로소 제자들은 미리 여러번 말씀하신 부활을 기억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어처구니 없는 것은 제자들은 기억 못했지만 오히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기억했다는 것이다. 62-64절은 그들이 주님의 부활에 대한 언급을 기억했기 때문에 무덤을 지켜달라고 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오히려 제자들보다 더 기억력이 좋다. 하지만 64절 말씀처럼 그들은 주님의 부활을 믿었던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클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주님의 부활의 예언은 기억했지만 정작 부활에 대해서 그들은 전혀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혹시라도 시체가 도둑맞을까 무덤을 지키게 해달라는 용의주도함이 엿보인다.
주님의 말씀이 능력이 되지 않는 이유는 그 말씀을 걸러 듣거나, 혹은 나 자신을 위해 이용하려 하기 때문이다.
주님, 말씀을 읽을 때, 그 말씀이 나에게 음성으로 올 때, 순수히 받게 하소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많이 있지만, 말씀을 내 이익을 위해 이용하거나 마음대로 이해하려는 것에서 구원하소서. 주님을 위해 내 시간과 물질을 언제든 내어 놓을 준비가 되어 있게 저의 마음을 채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