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을 할 때 가끔 헛갈리는 부분 혹은 도전되는 문제가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이 정체성에는 두 가지 면이 있기 때문인데, 하나는 위치적인 면과 다른 하나는 기질적인 면이다. 위치적인 면은 처음 주님을 영접함으로 우리의 위치가 완전히 바뀌게 되는 것인데, 바로 어둠에서 빛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저주에서 축복으로, 죄인에서 의인으로, 이방에서 권속(가족)으로 저주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바뀐 것이다. 그래서 한번 바뀐 위치는 생명을 얻는 문제이므로 무를 수는 없다.

하지만 위치적인 변화가 있다해도 삶을 통해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바로 기질의 문제인데, 위치의 변화가 기질의 변화를 반드시 보증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리가 사람됨을 폭로하는 것 처럼, 우리의 기질은 우리의 위치에 대해 항상 질문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 기질 문제의 대안은 십자가를 지는 것 외에는 없다.

구약 여러 곳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선민으로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은 위치에 있음에도 하나님을 떠나서 타락하고 심판을 받는데, 하나님께서는 보통 그 심판을 주위 이방민족을 통해 하신다. 하지만 후에는 그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셨던 이방민족에 대해서도 심판하시는데, 그들이 이스라엘 민족을 너무 혹독하게 대하거나 옆에서 비난하거나 고통에 대해 기뻐하면 그들 역시 심판을 피해갈 수 없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세운 민족이기 때문에 그들을 업신여기고 비웃는 것은 하나님을 비웃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구약 경륜에 따라 그 위치가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이제 신약 경륜에서는 믿는 이들이 그것을 이어 받았고, 오히려 더 큰 영광을 얻는다. 이스라엘은 그 경륜의 경계가 물질적 세상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그 경계가 영적인 것이고, 이스라엘은 육적인 백성이지만, 우리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위에서 태어난,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영광의 위치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면적 유대인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비웃고 괴롭히는 이방들이 심판을 받았던 것 처럼, 믿는이들을 괴롭히고 업신여기는 이들 역시 그에 보응하는 큰 심판이 있다 (계 16:5-6). 그래서 우리는 함부로 남을 저주하거나 복수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 억울한 일을 당할 때 그것이 나의 잘못인지 우선 보게 하시고, 만약 주님의 이름을 위해 당하는 어려움이라면 기뻐하게 하시고, 그들을 위해 축복할 수 있는 마음 주소서. 우리를 영광스러운 위치로 옮기셨으니, 우리의 기질 역시 오늘도 옮겨지고 변화받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