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의 두로를 보니 마치 일본을 보는 것 같다.  2차 대전 때 나치가 무리하게 소련으로 진군해서 실패했던 것 처럼, 일본 역시 무리하게 중국을 침략해서 군대가 나눠지고 미국과 마찰이 시작되어 미국까지 전쟁에 끌어들이더니 결국 원폭으로 완전 패망했다.  하지만 어처구니 없게도 한국전이 발발하자 회복되기 힘들어 보였던 일본은 빠르게 회복하더니 곧 세계 2위 경제 대국이 되었다.  물론 이제는 중국 다음으로 3위가 되었고 여러 문제를 안고 있지만 역사 속에서 한국의 어려움을 이용해서 경제대국으로 일어선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고 그 원인을 제공해준 한국으로서는 너무 배아픈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 두로처럼 일본은 지금 여러가지 위기를 맞고 있다. 

역사가 전개되고 특히 전쟁이 벌어지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오늘 말씀은 그 배후에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라고 밝힌다.  그런데 이상한 부분이 있다.  15-21절은 두로의 완전 패망과 더불어 이 땅에서 아예 사라지게 될 것을 예언하지만, 두로는 주님 시대 때도 아직 건재했었다.  그래서 주님은 ‘두로와 시돈’을 말씀하며 그들이 오히려 회개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마 11:21).  즉 에스겔은 두로의 완전 멸망을 예언했지만 몇 백년이 지난 후 주님 오셨던 때까지 두로는 남아있고, 오늘날에는 레바논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어찌된 것일까?  개인적으로는 지역적인 두로의 지명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시 두로의 권력자들과 정권, 그리고 그들이 활동했던 주요 무대를 말씀하신 것 같다.  고고학적으로도 이제는 그것을 찾기 어렵다고 하는데, 아래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으로 시작했지만 후에는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철저히 무너지게 됨을 보여준다.  두로의 ‘잔당’들은 ‘두로섬’에 남아 있었는데, 알렉산더는 바다를 아예 매꾸어 그 성을 철저히 쓸어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원래 두로는 이제 없고 특히 원래 두로성은 이제 고고학적으로도 찾아 보기 힘들게 되었다.

하나님의 예언이 항상 우리 때에 이루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주님의 재림 역시 그런 것인데, 지난 2천년 동안 신실한 주의 종들은 주님 다시 오심을 믿고 기다렸지만 그 영광을 보지 못했다.  우리의 시대도 주님 오실 수도, 오지 않으실 수도 있다.  로마서 8:24에는 재미있는 구절이 있는데,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라고 말씀한다.  보통 구원은 ‘믿음’을 통해 은혜로 얻지만, 여기에서는 ‘소망’으로 얻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얻었다’의 시제가 아오리스트이다.  즉 소망이 우리로 구원을 얻어오게 한다는 팩트를 의미한다.  그래서 25절에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권한다.  8장 1-2절에는 그 유명한 선포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에 대해 24-25에는 소망과 참음으로 기다림을 말한다.

주님의 예언은 우리에게 소망으로 인내함을 요구하며 또한 그를 가능케 한다.

주님, 원수 갚으시는 것이, 주님의 예언의 말씀이 바로 바로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시원할까요?  하지만 주님의 주권을 믿는다면 참음으로 기다릴 수 있음을 배웁니다.  열매가 익으려면 시간이 걸리듯이 우리로 성숙되게 하기 위해 시간을 주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오늘 믿음으로 소망하며 조금 더 주를 향해 성숙되게 하소서.

(http://www.biblearchaeology.org/post/2010/01/26/The-Biblical-Cities-Of-Tyre-And-Sidon.asp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