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두로왕을 심판하시면서 그의 죄가 ‘교만하여 자신을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했음’임을 밝힌다.  그런데 12절부터는 좀 이상한 말씀이 나온다.  두로왕에 대해 말씀하시지만 갑자기 시제가 바뀌고 ‘완전한 도장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던, 더우기 13절부터는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 14절 ‘기름 부음을 받고 지키는 그룹, 하나님의 성산에 있’던 이를 말씀하는데, 이러한 언급은 당시 두로 왕의 얘기와는 거리가 멀다.  특히 15절의 내용은 이 ‘지키는 그룹’이 하나님의 산에서 쫓겨나고 불타는 돌들 사이에서 멸하여졌음을 말씀한다.

이러한 내용은 두로왕에 대해 말씀하는 동시에 옛적 마귀가 어떻게 타락했는지의 경위도 알 수 있게 해 준다.  비슷한 내용이 이사야 14장에도 나오는데, 거기에서는 두로왕 대신에 바벨론 왕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시면서 ‘계명성’ 즉 옛날 처음으로 창조받은 천사가 어떻게 교만함으로 타락해서 마귀가 되었는지 귀뜸해 준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사 14:13-14)”

사람이든 천사든 교만해지면 하나님과 동등해지려고 한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교만이다.  정치적으로도 열국을 통일시키면 절대강자가 되어 자신을 신의 위치로 끌어올리려 했음을 본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절대권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7절 ‘이방인 곧 여러 나라의 강포한 자를 거느리고 와서’ 라는 말씀처럼 언젠가는 주위 나라들에 의해 멸망당했거나 혹은 내부의 분열로 망하고 말았다.  결국 이러한 이들의 결말은 그들이 ‘사람일 뿐이요 신이 아니라 (9절)’는 것을 밝힌다.

‘하나님 같아지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위의 경우 처럼 자신을 신의 위치로 높이려는 교만한 것이 있는 반면, 그와는 반대로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 있다.  둘 다 ‘하나님 같아지는’ 것 이라고 생각될 수 있겠지만 그 차이는 소위 천당과 지옥 차이다. 

창세기부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을 닮아가도록 설계하시고 창조하셨다.  창세기 1:26에서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라고 기록하며 사람은 하나님을 닮도록 창조된 것은 물론 그 권위까지 주어졌다.  더우기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인간은 하나님께서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생명이 주어진 매우 특별한 존재다 (창 2:7).

하지만 ‘하나님 같아질 것’이라는 마귀의 유혹 때문에 인간은 그 방법을 매우 빠르고 간편한 길을 택했는데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은 것이다.  지식을 얻음으로 더 이상 하나님이 필요없고 자신이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으리라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이 독사과 같은 선악과는 인간으로  하나님과 같아 지려는 시도를 계속하게 만들었는데,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 (롬 3:23).

그와는 반대로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길이다.  바로 겸손함으로 십자가를 지고 자신의 육신을 처리하고 주님의 생명을 계속 공급받고 변화됨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요일 3:2에서 분명히 나타나는데,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라고 기록하며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 우리는 그와 같게 되고, 주님을 닮음으로 주님과 같이 되기 때문에 우리 두 눈으로 그 분 그 모습대로 볼 수 있게 된다.

빌립보서 2장과 3장에는 이 비밀에 대해 말씀하는데, 6-11절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고 기록한다.  계속해서 3:10은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라고 하며 하나님 같이되는 비결은 그리스도의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심을 본받는 것이라고 한다.

히 5:8-9은 이에 대해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 온전하게 되셨은즉”이라고 하며 온전하게 되는 길은 고난을 받고 순종함이며, 계속해서 벧전 2:21에는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말씀한다.

성경은 우리가 교만함으로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것을 무엇보다 경계하지만,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 그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생명으로 주를 닮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삶의 비밀이요 목적임을 분명히 한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경배 받으시고 섬김 받으시지만, 그날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을 우리의 두 눈으로 맞대고 보게 된다.  즉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생명은 결국 우리로 하나님 닮아 하나님 같이 거룩하고 온전하게 변화시킨다.  이를 위해 오늘도 값을 지불하고 대가를 치르며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

위치적으로는 결코 하나님 같아질 수 없지만, 그 기질면에서 또 생명적인 면에서는 인생의 목표는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주 예수님, 하루 하루 삶 속에서 얼마나 제가 내 삶의 주인이 되려는지요, 얼마나 제가 하나님의 위치를 취하는지요, 얼마나 제가 맘대로 판단하고 정죄하고 행하는지요.  이러한 교만은 심판받아 마땅합니다.  주님께서 내 삶 속의 주인되시고, 저로 온전히 주님을 주로 섬길 수 있는 겸손하고 깨끗한 마음 주소서.  주께 순종함으로 고난을 통과하는 하루 하루가 모여 언젠가 저로 주님 닮아 거룩하고 영화롭게 될 줄 믿습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을 고백합니다.  저 안에서 더 깊이 역사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