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큐티 제목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전히 회복된 삶’이다. 본문에는 ‘회복’이라는 단어가 없지만 그 내용은 분명 회복에 관한 것이다. 특히 포로로 끌려갔던 백성들이 돌아오고 심판을 받아 황무지 처럼 변했던 땅이 예전 처럼 사람들로 가득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당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말씀이지만, 그 후 주님 오셨던 때에도 사람들은 로마의 압제하에 있던 상황으로부터 회복되는 때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행 1:6). 구약의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자 그의 나라로 예표되던 이스라엘의 회복은 중요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원래 관심은 이스라엘 만의 회복이 아니라, ‘만물의 회복’이었다 (행 3:21).
그런데 이 ‘만물의 회복’ 조차도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은 아니다. 회복의 문자적인 의미는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지만, 노아 홍수 이전이나 에덴 동산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피조물 (고후 5:17)’로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신다.
주님을 믿고 중생의 경험과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정체성이 있음에도 연약하여 실수하고 범죄할 수 있는데, 이러한 것에 대해서는 요일 1:9 말씀 처럼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해결하고 회복될 수 있는 방법을 주셨다. 하지만 결코 회복할 수 없는 범죄함도 있는데, 히 6:6에는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고 말씀한다. 여기서의 이 ‘타락’은 도덕적 타락이라기 보다는 아예 주님을 부인하고 과거 주님을 모르던 삶으로 돌아가는 배교를 말한다. 그래서 평생 주님을 섬기는 것 처럼 살았어도 죽기 전 주님을 부인한다면 그의 모든 삶은 하나님 앞에 인정될 수 없다. 그래서 지난 에스겔 33장에서도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공의가 구원하지 못할 것’임을 말씀했다.
회복에 있어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관계의 회복인데, 이러한 회복은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기에 혼자 변한다고 회복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선 나부터 변해야 회복을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나부터 변할 수 있는 열쇠는 9절 ‘내가 돌이켜 너희와 함께하리니’ 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용납하시고 함께 하시며 회복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에 있다. 신약에서는 성령으로 인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을 떠나지 않으시는데, 우리가 실수하고 범죄하는 현실적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께 돌아오기만 하면 회복은 이루어진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계 21:5)”
주님, 아침마다 다시 기회를 주시고 새롭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인간 사이에서 관계가 틀어지기도 하지만, 주님께서 매일 새로운 아침을 주시는 것 처럼, 우리도 서로에게 새로운 날로 용납하게 하소서. 내 입술로 주를 부인하지 말게 하시고, 이전 것은 지났으니 그에 대해 묶이지 말게 하시고, 주께서 새롭게 하신 것 처럼, 오늘도 이 새롭게 하심을 붙들게 하소서. 이전 것은 기억하지 않으시겠다는 주님의 말씀이 나의 삶 속에도 적용되게 하소서. 주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며 오늘 이 아침에도 새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