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 종교와 기독교를 가르는 한 가지 요소는 ‘삼위일체’고, 천주교와 개신교를 구분하는 것은 ‘이신칭의’이다.
그런데 이 둘 모두 매우 잘못 만들어지고 잘못 쓰이는 단어같다. 우선 ‘삼위일체’의 ‘일체’는 영이신 하나님을 마치 육신처럼 오해하게 만들 요지가 있다. 그래서 그냥 ‘위’와 ‘체’를 빼고 ‘삼일’이면 족할 듯 하다.
‘이신칭의’ 역시 문제가 있는데, 이 한자가 언제 누가 처음 사용했는지는 모르지만 여기에서 ‘칭’이라는 단어가 매우 헷갈리게 만든다. ‘칭’이라는 단어가 ‘칭하다’의 뜻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죄인을 그냥 주님께서 ‘옛다, 너를 그냥 의롭다고 불러 주겠다’라고 느낌을 갖게 된다. 하지만 주님의 justification은 이미 완전하고, 주 앞에 우리는 온전히 의롭다함을 얻었다. 그 주체이신 하나님 입장에서는 (우리의 입장이 절대 아님) 그냥 ‘칭’한게 아니라 무를 수 없는 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이신칭의’를 말하는 성경 구절은 특히 로마서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아래 구절들이다.
(롬 3:24, KJV) 『Being justified freely by his grace through the redemption that is in Christ Jesus:』
의롭다 하심을 ‘얻은’ – 현재 수동태
(롬 3:28, KJV) 『Therefore we conclude that a man is justified by faith without the deeds of the law.』
동일: 의롭다 하심을 ‘얻는’ – 현재 수동태
(롬 4:2, KJV) 『For if Abraham were justified by works, he hath whereof to glory; but not before God.』
아오리스트 수동태
(롬 5:1, KJV) 『Therefore being justified by faith, we have peace with God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아오리스트 수동태
(롬 5:9, KJV) 『Much more then, being now justified by his blood, we shall be saved from wrath through him.』
아오리스트 수동태, 하지만 ‘이제, nun G3568’라는 말이 있음.
(롬 8:30, KJV) 『Moreover whom he did predestinate, them he also called: and whom he called, them he also justified: and whom he justified, them he also glorified.』
주체가 하나님이시기에 능동태, 아오리스트
모두 ‘의’라는 단어의 동사격이고, 이것은 항상 ‘법’과 관련되어 있다. ‘법’에 대한 개념이 없으면 ‘의’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영어나 헬라어로 보면 너무 쉬운데 수동태 자체가 없고 피동 동사만 있는 우리 말이 이럴 때는 좀 불리하다. ‘먹다’의 피동형이 ‘먹히다’지만, 한자가 끼어들면 ‘의롭게 하다 justify’의 피동형이 잘 표현이 안된다. ‘의로워지다’도 아니고 ‘의롭게 되다’도 아니며 (마치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되었다는 것 처럼 들릴 수 있기에) ‘의로움을 입다’도 아니다. 아… 그래서 로마서 번역을 항상 ‘의롭다 하심을 얻다’로 길게 번역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칭하다’보다는 ‘얻다’가 더 자연스럽고, 이신칭의 보다는 굳이 한자어로 만들자면 이신’수’의가 더 낫다는 생각이다. (‘얻다’ 역시 우리의 노력의 결과라는 의미로 들릴 수 있기에...) 우리가 받은 의로움은 시간을 초월했던 아오리스트 면도 있지만, 현재 ‘믿음으로’ 받는 의로움도 있다. 그것은 ‘율법의 행위’로 얻는 믿음이 아닌 생명의 성령의 법 안에서 이루어지는 ‘수의’다. 이것은 단번에 받는 의로움도 있고 동시에 계속 받아가는 justification도 있다. 문제는 어떤 법을 우리가 섬기고 있느냐에 있다.
- 점심 먹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