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기즈스탄 방문으로 한동안 큐티 나눔을 쉬었다가 다시 하려니 새로운 느낌이다. 어제도 (정확히는 오늘) 새벽 2시에 잠이 깨어 뒤척이다보니 머리가 조금 멍하다.
방문 중 팀원들과 매일 큐티를 하며 나눔의 시간을 가졌는데 매우 은혜로운 시간들이었다.
오늘 제목에 ‘성전 중심’이라는 말이 있는데, 과연 키르기즈스탄 방문 동안 나의 중심은 그리스도였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여러 가지 일들, 그리고 또한 여러 사람들과의 만남, 그리고 뒤바뀐 시간 속에서 하루 하루를 소비하며 과연 나는 주님을 따랐는지, 또 동행했는지, 현지인들과 관계를 빌드업하면서 그 목적은 주님을 향하고 있었는지..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의아하게 생각되는 것들이 몇 개 있는데, 먼저 왜 ‘성전 중심’을 이야기 하면서 정작 성전은 몇 개의 지파를 언급하고 나서 중간에 언급하는지, 그리고 왜 지파의 순서가 그러한지, 그리고 후반부 성읍 문들에 대한 지파들의 순서와는 왜 또 다른지… 물론 지형을 따라 북쪽부터 열거하기 때문에 그러한 순서가 되었겠지만, 원래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이 중심이었다면 예루살렘성 즉 중심부터 위 아래로 열거하는 것이 더 이치에 맞았을 듯 하다.
아무튼 이번 장 각 지파의 지형이 맨 처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을 때 각 지파가 받았던 것과는 다른 것이 눈에 띤다. 각 지파의 순서도 순서거니와, 처음에는 지형에 따라 즉 산과 하천의 형국을 고려해서 땅을 나누었기 때문에 경계선이 구불구불해졌지만 이번 장에서는 그냥 ‘동쪽에서 서쪽까지’라는 애매한 기준으로 경계가 정해졌다. 거기에다 이미 나누어진 것에 대해 또 ‘제비뽑을 것’을 말씀하신다. 이러한 내용을 접했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혼란을 겪지 않았을까?
하지만 생각해보니 혼란을 겪게 하는 것은 땅을 기준으로 했을 때 온다. 지도를 만들고 하늘에서 보면 땅의 형국을 초월한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비행기를 타고 하늘 위에서 보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이는 작은 땅에서 사람들은 서로 치고 박고 삶을 허비한다. 물론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의 어떠함과 인간의 연약함에 묶일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주님의 산상 수훈이 귀하다. 그리고 그 말씀 자체이신 주님이 귀하다.
성전이 중심이 될 때 사람은 땅의 형국에서 해방된다. 여러 가지 제약으로 막혀있는 인생이지만, 하늘에서 바라보는 하나님의 시각을 가질 때, 성전을 중심으로 레위, 그리고 유다와 르우벤, 그리고 각 지파를 흐르는 하나님의 생명과 다스리심을 볼 수 있게 된다.
주님, 주의 다스리심이 오늘 그리스도를 섬기는 각 심령 속에 있게 하소서. 삶의 여러 가지 제약과 도전들은 울퉁불퉁 튀어나오고, 도중에 하천이 가로 막기도 하지만 그들을 초월할 수 있게 우리를 하늘에 두소서.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 (엡 2:6)”셨사오니 이 땅의 형국에 묶이지 않고 하늘에서 다스리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