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는 그의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처음으로 교회를 계시하셨고 천국의 열쇠도 주셨다. 그 누구보다도 주님과 더 가까이 지낸 베드로였기에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8,9)'고 말하며 이방 땅에 흩어져 있는 믿는 이들을 칭찬한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그의 서신에서 '교회'라는 말은 5 13절 단 한번 나온다. 물론 그의 서신의 대상이 비교적 광활한 지역을 대상으로 했기에 그랬을 수 있지만 넓은 지역인 갈라디아에 대해서는 바울이 '교회들'이라는 표현을 썼던 것에 비해 베드로전서 수신자는 '흩어진 나그네'이다. 과연 '교회'는 그에게 무슨 의미였을까? 더우기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보다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4)'고 말하며 '이 땅'보다는 '하늘'로 관심을 옮긴다.

왜 수제자인 베드로가 전체 성경에서 단 두권인 베드로전서와 후서를 쓰면서 그 내용도 많지 않을 뿐더러 염세주의적인 느낌을 받게 하는 걸까? 그런데 21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는 구절을 읽으니 이해가 된다. 말세는 주님 승천하신 후부터 항상 말세였다. '나그네'라는 단어를 쓰면서 수제자 베드로는 인생의 믿음과 소망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단순히 염세주의가 아님을 다음 절 22절에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며 의미없고 한계있는 나그네같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며 형제 사랑하기를 서로 뜨겁게 하라는 말씀이다.

키르기즈스탄에 잠간 다녀온 것을 선교라고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방문 후 시차와 감기로 며칠 고생하면서 그 사역을 뒤돌아보니 무언가 이루는 것 자체를 주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음을 오늘 말씀을 통해 결론 짓게 한다.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 즉 복음은 결론적으로 서로를 뜨겁게 사랑함에 이르게 한다.

주님, 주님 믿는다고 하면서 비신자들이 추구하는 세상의 즐거움과 쾌락을 추구함을 고백합니다. 형제를 비난하며 넘어뜨리면서까지 나를 세움으로 무언가 이루려는 착각에 사로잡혔던 적도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주께서 거룩하시니 저도 거룩함만을 추구하게 하소서. 주께서 이미 의롭게 하셨으니 하나님의 의 안에 있게 하소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