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절 말씀을 읽으면서 과연 기독교는 정말로 금욕주의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물론 금욕주의가 아니라는 답변을 듣지만 그 답은 세상의 여러 가지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기뻐하고 누리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세상 것에 대해서는 금욕주의라는 결론을 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과연 내가 아무 생각없이 즐기는 여러 가지 일들, 예를 들어 영화나 드라마를 본다거나 혹 스포츠에 열광하는 등 죄가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나의 마음과 정신으로 추구하며 (에피뚜미온, 정욕) 거기에 내 시간과 열정을 빼앗긴다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에 걸리게 된다. 과연 그렇다면 믿는 이들은 세상에서 그냥 심심하게 살아야 하는가? 물론 그에 대해 다시 '온전히 주를 사랑하고 주만 누리라'는 답을 얻지만, 과연 그것이 가능한지 다시 의문이 든다. 현재의 문화나 가치관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회개가 필요한 것인지… 아마도 영적 성숙도의 문제일 것이다. 그래서 예언은 믿음의 분수대로 하라는 말씀이 생각난다.
재미있는 것은 1장 9절에서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고 말씀했는데, ‘영혼’의 원어는 ‘ㅍ쑤ㅎㅔ’로 ‘혼’이다. 즉 믿음의 완성은 혼의 구원인데, 11절 역시 ‘육신(싸르크)의 정욕’이 ‘혼’을 거슬러 싸운다고 한다. 왜 ‘영’을 거슬러 싸운다고 하지 않고 ‘혼’을 언급할까? 그것은 우리 삶의 문제는 ‘혼’ 즉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 그리고 현실과의 싸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뒤로 계속해서 눈에 띠는 두 단어가 ‘순종’과 ‘선행’이다.
12절에는 ‘행실을 선하게’ ‘선한 일’ 15절 ‘선행’ 20절 ‘선을 행함’ 등을 말씀하는데, 12절의 ‘선’은 헬라어로 ‘칼로스’로서 ‘좋다, 선하다, 탁월하다, 뛰어나다’ 등 여러 의미가 있고, 그 단어는 결국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즉 우리의 선의 원천은 우리를 탁월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에게 있다. 그래서 여기에서의 선은 도덕적인 선이나 상대적인 선이 아니라 율법을 행함이나 인간의 노력과 육체를 신뢰하려는 것에 대해 심판을 가하는 절대적인 선이다. 하지만 15절 20절의 선은 ‘아가또스’로서 상대적으로 도덕적인 선을 의미한다. 즉 삶에서 나타나는 아름다운 것들이다.
13절과 18절에서 ‘순종’은 ‘후포타쏘’인데, 결국 이 두 구절은21절 ‘자취를 따라오게’에서 ‘따라오게 (에파콜루떼오)’를 가능하게 한다. 우리말 ‘순종’에서 ‘종’의 의미가 ‘따르다’는 뜻이기에 순종은 단지 말을 듣는다는 의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그 발자취를 따른다는 의미다. 그래서 자녀들이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며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먼저 부모나 남편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범을 보일 때 가정 전체가 그를 따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주님, ‘나의 가는 이 길 끝에서 나는 주님을 보리라’는 가사처럼, 주님 가신 길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오늘 한 걸음이라도 그 길 따를 수 있는 마음과 능력 주소서. 나의 혼을 기쁘게 하는 세상의 것들을 멀리할 수 있는 분별 허락하소서. 단지 나의 가는 길의 끝에서만 주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앞서 가시는 주님을 따르고, 또 옆에 계시는 주님과 동행하는 하루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