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전에는 종교성을 바탕으로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같은 책이 출판되었었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삶을 본받아 그렇게 살아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노력해도 안되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서 7: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의 말씀을 들어 인간의 실존적 한계로는 결코 그리스도를 본받을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이 최근 화자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바울은 고전 11:1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씀했고, 더우기 오늘 베드로 역시 13절에서 비슷한 말을 한다. 13절의 원어는 ‘그리고 선을 흉내내는 사람이 된다면 누가 너희를 해하겠느냐?’ 라고 하는데, ‘흉내내는’ 뜻의 ‘미메타이’는 '열심으로 행하는' 이라고 번역됐지만, 많은 경우 ‘따르는’ 이라고 번역되었고, 위 고전 11:1과 더불어 엡 5:1, 살전 1:16, 2:14, 히 6:12 등에서 ‘본받는’으로 쓰였다.
만일 그리스도나 하나님 또 바울의 경우 형제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한 말씀이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이라면 말씀하지 않으셨겠지만, 말씀한 이유는 이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존적 죄인의 신분으로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생명을 이미 소유한 이들에게는 본을 보고 따르는 것이 필요하고 또 수월하다. 그래서 베드로는 15절에서 이미 우리 안에 있는 소망에 대해 말을 하고 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 등 이 없다면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종교적인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하는 것은 웃픈일이 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16절)’는 ‘선행 (16절)’ ‘선을 행함 (17절)’ 즉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당연한 의무가 된다. 최근에 화자되는 얘기의 결론이 주를 본받는 문제가 생명(조에)의 문제이며, 결론적으로 주님의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주님, 주님의 생명없이는 주님과는 상관이 없고, 주를 본받을 수 없음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주께서 이미 제 안에 계시고, 저와 항상 함께 하시기를 기뻐하심을 알기 때문에, 저는 주를 본받는 삶을 추구할 수 있음을 배웁니다. 다만 주를 본받기 위해 다른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따르게 하소서. 주의 생명이 제 안에서 풍성해지시기 원하고 그 생명으로 인해 주를 능히 본받게 하소서. 제가 주를 본받는 것에 때때로 실패한다면 그것은 실패와 좌절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함을 향해 나아가는 발판이 됨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