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의 ‘장로’에 대해 생명의 삶 해설에서는 ‘현대 교회의 장로 직분과는 다른 개념이다’ 라고 설명했다. 어릴 적 부터 성경을 읽어 오면서 성경의 많은 내용과 현재 교회들의 많은 모습이 다른 점을 보고 혼란이 있었다. 왜 ‘현대 교회의 장로 직분’이 성경의 ‘장로’와 달라야 할까? 왜 현재의 모습을 성경에 맞추지 못하는 것일까? 결론적으로 그것은 성경을 따르지 않는 것 아닌가? 성경의 교회와 현재의 교회가 일치되어야 한다. (물론 성경의 교회가 모두 완전한 것이라는 말은 아님) 사실 개혁이 이런 것이 아닐까?
베드로는 수제자였지만, 그의 위치를 남들보다 더 높인 것이 아니라 ‘너희 중 장로들’에 대해 자신을 ‘함께 된 장로’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다른 장로들에게 권하는 말씀이 1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라. 2 그들을 감독하라 (원어, 에피스코푼테스, 자세히 살펴보고 도움을 주다). 3 억지로 말고 자원해서 하라. 4 이익을 목적으로가 아니라 기꺼이 하라 등이다.
그런데 3절 말씀은 좀 충격적인데, 소위 많은 ‘주의 종’들의 ‘성직’에 대한 입장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라고 했는데, 원어에는 ‘클레론’에 대해 ‘카타쿠리에우온테스’하지 말아라 고 되어있다. ‘클레론’의 의미는 ‘제비뽑은 결과, 기업’ 등의 뜻인데, 많은 곳에서 사도들이 받은 권위 혹은 일반적인 구원을 칭하는데 쓰였다. ‘카타쿠리에우온테스’는 ‘자기의 권한 아래 놓다, 주인 행세를 하다’ 등의 뜻이다.
이러한 말들은 즉각적으로 로만카톨릭의 암흑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성경을 지켰지만 결코 오픈하지 않고 그것을 가지고 말씀의 주인 행세를 하며 평민들 위에 군림했다. 주께 받은 소명 의식에 투철한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장로들은 동시에 가르치는 목자들로서 (딤전 3:2) 그 위치를 주인행세하기 위해 쓰면 안된다. 오히려 모든 일에서 같은 고난을 받으며 양 무리가 경험하는 것을 경험하고 그 무리의 본이 되어야 한다.
다른 이들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으면 많은 것들이 쉽다. 서로 머리 아프게 설득할 필요도 없고 싸울 필요도 없이 그냥 권위있게 기침만 한번 하면 된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 보다는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말씀한다. 즉 감독이라고, 장로라고, 양들과 다르게 생각하지 말고 그들 가운데 본이 되라고 명한다.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게 된다 (4절).
5-7절은 ‘장로’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린 ‘젊은이들’에게 권하는 말씀이다. 먼저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모두 서로 간에 겸손으로 허리를 묶음으로 순종하라 (장로들에 대한 단어와 동일)고 한다. 교회 안에서 치리권은 분명 장로들에게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장로가 아닌 이들 즉 젊은이들은 그들의 치리 아래 있어야 하는데, 감각이 젊다고 해서, 젊은 혈기로 그들의 권위 아래 있기를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거부하는 것과 같음을 말씀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해야 하고, 때가 되면 젊은 그들도 장로로 섬길 수 있게 된다.
교회 혹은 기독교 내의 많은 문제는 대게의 경우 권위의 문제에서 발생한다. 그 해결점은 장로 혹은 목자들은 그들의 위치에서 겸손하게 섬기고, 장로 아닌 이들 역시 그들 위치에서 겸손히 서로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망이 있다면 겸손해야 한다.
그런데 7절에서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말씀한다. 이 구절이 앞 구절들 보다는 8절 이하 구절과 더 연관이 있는 것 처럼 들리지만, 오늘 생명의 삶 본문은 7절도 포함시켜 놓았다. 아마도 교회 내의 여러 관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상황에 대해 우리는 우리의 지혜와 능력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 보다는 우선 주님 앞에 가져가서 이 문제를 주님의 빛으로 재조명하고 모두 다 주께 맡겨 버려야 함을 말씀하는 것 같다. 아직도 내안에는 혈기가 왕성하고 내 입장에서 선과 악, 의와 불의를 구별해 내려고 한다. 하지만 주님께 우선 맡겨 버릴 때 문제는 더이상 커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돌보심을 경험하게 된다. 이 또한 나를 해방하는 십자가이다.
주님, 여러 가지 염려가 있습니다. 말실수, 잘못된 상황 판단, 나의 자존심을 세우려는 문제 등에서 관계들이 어려워짐을 경험합니다. 나 자신이 해결해야 할 것과 그 책임은 분명 있지만, 나의 능력이나 힘이나 방법을 먼저 동원하려는 유혹을 끊습니다. 먼저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주님께 맡깁니다. 아.. 이것은 해방임을 고백합니다. 감사합니다. 문제를 키우지 말고 오직 주님의 돌보심이 커짐을 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