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를 시작할 때부터 있던 의문은 왜 수제자 베드로가 ‘교회’라는 말을 쓰지 않았을까였다. 한국어 또 영어 번역에서는 5장 13절 ‘바벨론에 있는 교회’라고 나오지만 원어에서는 이마저 ‘교회’라는 단어가 삭제된다. 그냥 ‘바벨론에 있는’ 이라고 쓰며 ‘교회’는 이해된 것으로 여긴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베드로전서를 읽으며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고난’이었다. 히브리서는 배교에 대해 경고한 부분이 많았는데 아마도 입교자들 중에 핍박을 받는 이유로 배교가 시작되었고, 이제 베드로는 그러한 핍박을 받는 가운데 견디는 이들 즉 고통 당하는 이들을 위해 베드로전서를 쓴 것 같다. 그래서 지난 1장 6절에서는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라고 썼고, 이번 마지막 장 9절에는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고 기록한다.
인생의 노년기를 맞이하며 베드로는 주님의 약속을 기억했을 것이다. 특히 교회에 대한 주님의 말씀,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18)’는 말씀은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하루에 3천 명이 회심하고 복음은 거칠 것 없이 뻗어나가는 것 처럼 보였지만, 후에 예루살렘에는 환란이 임하고 몇 십년이 지난 후 많은 믿는 이들은 핍박과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교회’라는 단어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봤을 수도 있다 (완전히 개인적인 생각).
하지만 다시 2장으로 돌아가서 9절에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라는 구절이 있는데 ‘불러 내어’가 ‘교회’라는 단어와 흡사하다. 그리고 2장은 어떤 장소나 기관이나 조직으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영적인 집’임을 계시하며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5절)’고 말씀한다. 아마 그 당시에도 건물에 ‘교회’라는 간판만 걸고 교회답지 못했던 모임이 많았나보다. 아마도 ‘교회’라는 단어는 이제 너무 진부하고 사람들에게 단지 종교적인 장소로만 비춰졌는지 모른다. 그래서 5장 마지막까지 ‘교회’라는 단어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항상 존재하는 것을 전제하에 베드로는 편지를 썼다. 특히 어제 말씀 중 ‘너희 중 장로들’ ‘양 무리’ 등의 언급은 분명 교회를 말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교회’라는 단어도 그렇고 기독교의 매우 좋고 귀한 단어들이 변질되어 온 것을 본다. 적어도 세상에 대해서는 그렇다. 예를 들어 ‘사랑’이라는 단어는 너무도 그에 대한 이해가 다를 수 있기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씀은 받는 사람마다 해석이 다를 수 있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 인데, 요즘은 물론 ‘교회'에 대해 계속 성경적인 이해와 해석 즉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임을 많이 말하고 있지만, 그래도 ‘00교회’라고 부르면 먼저 건물이 생각나고, 나 역시도 ‘교회 간다’라는 말을 스스럼 없이 한다.
8-9절의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대적 마귀를 대항하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단체적인 문제다. 그래서 ‘너의’가 아니라 ‘너희’라고 말씀한다. 교회로서 함께 서지 않으면 각 개인은 대적 마귀의 먹잇감이 되기 쉽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엡 1:23)”!
주님, 사도 베드로의 의중을 읽기 원합니다. 성령 안에서 기록했으므로 그것은 바로 성령님의 마음임을 인정합니다. 이 시대에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산 돌로서 세울 수 있는 영적 이상을 허락해 주소서. 각자가 이해하는 종교적인 ‘교회’가 아니라, 정말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으로서의 교회, ‘산돌로 영적인 집으로 지어지는’ 교회를 보게 하시고, 그런 교회가 되게 하소서. 이 교회는 '우리 교회'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소유인 주님의 교회임을 인정합니다. 믿는 자들 안에서 더욱 역사하시고 마지막 때에 주님의 몸을 세우시고, 원수를 대적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