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가 첫 번째 편지에 이어 두 번째로 편지를 보낸다. 벧전의 수신자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면 베드로 후서의 수신자들은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이다. 이 둘은 마치 불특정 다수 같이 들리지만 분명히 동일한 사람들로서 믿음의 사람들이다.
이 편지가 각 믿는 이들에게 어떻게 전해지고 또 어떻게 읽혀졌는지는 모르지만 편지를 받은 이들은 감격하지 않았을까? ‘아, 이 분이 바로 베드로인가? 주님을 옆에서 3년 반 동안이나 모시고 모든 말씀을 듣고 모든 기적을 함께 체험했던 분인가? 그런 분이 쓴 편지를 지금 읽고 있는 것인가?’ 라며 감격했을 것이다.
그런데 둘째 편지에서 수신자를 정의한 후 바로 한 말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의 지식 안에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기를!’ 이었다. 벧전 3:7에서 남편들에게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하고’라고 했을 때 지식은 ‘그노시스’였지만, 여기의 ‘지식’은 ‘에피그노시스’이고 ‘에피기노스코’에서 왔는데, ‘에피’와 ‘기노스코’의 합성어로, ‘에피’는 ‘위에’, ‘기노스코’는 ‘알기 위해 배우다, 알아가다’ 등의 뜻이다. 즉 지식을 바탕으로 하지만 지식을 또한 초월한 그러한 앎이다. 은혜와 평강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기본적으로 주어진 것이지만, 이러한 것을 경험하고 살아내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깊이 배우고 아는 것이 필요하다. 단지 성경 공부가 아니라 연구하며 묵상하며 경험해야 하는 것이다.
3절의 ‘그의 신기한 능력’에서 ‘신기’로 번역된 구절은 ‘신성’의 뜻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의’라는 단어는 단수이다. 즉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한 분으로 봤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인데, 소위 ‘성육신’ 사건은 교리로 치자면 유대교나 이슬람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경악할 만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육신이 되셨기에 후에 오는 4절 말씀이 성립이 된다. 즉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인데, 바로 우리로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기 위해서 5-7절의 귀한 것들을 ‘더하라’고 명한다. 7절의 ‘더하라’ 라는 동사는 원어에는 5절에 있는데 (영어 처럼 동사가 먼저 오므로) ‘공급하라’의 뜻이다. 이 단어는 11절의 ‘주시리라’에 다시한번 나온다. 5절은 아오리스트 명령형이고 11절은 미래시제이다. 이 ‘에피코레게오’라는 단어는 매우 재미있는데, 에피+코레게오 합성어로, 코레게오는 ‘합창단 (노래하고 춤추는 그룹) 을 지휘하다, 합창단을 조직하며 그 필요를 채우다’ 라는 뜻이다. 즉 이 말은 하나에 다른 하나를 그냥 더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조화를 말씀하고 있다. 물론 믿음과 덕, 덕과 지식 사이의 관계는 있겠지만 굳이 그러한 것을 설명할 필요는 없다. 이 모든 ‘덕’들이 마치 성령의 열매 사랑이 뒤에 따라오는 8가지 것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7절의 ‘형제 우애’는 ‘삐라델삐아’ 그리고 ‘사랑’은 ‘아가페’이다. 8절 앞 부분은 ‘이러한 것들이 너희에게 있고 넘친다면’ 으로 번역할 수 있다.
오늘 구절을 묵상해보니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주님의 육신의 형제인 야고보나 유다와 더불어 주님 바로 옆에서 섬겼던 베드로 역시 ‘행함’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물론 1절부터 ‘보배로운 믿음’ 그리고 5절에도 ‘믿음’이 나오지만, 이 믿음은 행함과 항상 연결된다는 점이다. 사실 성경에서 믿음과 행함을 아예 따로 구별해 놓은 것은 없다. 바울 역시 믿음을 강조하지만 그것은 행함으로만 구원받지 못함을 말하는 것이지, 행함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5-7절의 말씀에는 ‘더욱 힘써… 더하라 (공급하라)’는 명령이 있다. 그리고 9절에는 이런 것이 없으면 맹인이라고 말씀하며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는 것이라고 말한다. 10절에는 ‘행한즉’ 이라고 하며 11절에는 ‘이같이 하면 ..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공급하리라)’고 하신다.
기독교 내의 두 가지 큰 교리적 차이는 소위 캘비니즘과 알미니어니즘인데, 캘빈주의자들은 알미니언주의자들을 이단시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감리교와 연관 교파는 모두 이단이 된다. 분명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한번 받은 구원은 잃을 수 없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입장과 관점이고 그래서 우리가 믿고 의지하며 따라야 하는 것이지만, 사람 자체는 처음에는 믿는 것으로 보여도 ‘데마’와 같이 타락할 수도 있고 또 배교할 수도 있다. 논리적인 접근이 아니라 성경으로 돌아간다면 분명 두 가지 모두 말씀하며 그 둘은 결국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이 먼저 오지만, 그것을 증명하는 것은 ‘행함’으로 '성장'해서 결국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다.
주님, 나의 노력만으로 신의 성품에 참여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공급하심이 있기에, 우리도 힘써 이 모든 덕을 더할 수 있음을 보며, 그럴 때 주의 공급하심이 더하실 줄 믿습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여 주소서. 열심을 낼 수 있는 주의 종들이 되게 하소서. 신성한 성품을 사모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