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절은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에이도, ‘보다, 인식하다, 인지하다, 알다’ ‘기노스코’와는 다름)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로 시작하는데, ‘이미 있는 진리’는 번역이 좀 아쉽다. ‘이미 있는 ’이라고 번역을 하면 마치 구약 말씀을 연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원어는 ‘파레이미’인데, 그 뜻은 ‘현재의, 현존하는’ 등의 뜻이다. 9절에서 ‘이런 것이 없는 자’의 ‘없는’에서 ‘현존하지 않는’의 같은 단어를 썼다.
아마도 당시 영지주의를 염두에 두고 쓴 말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든다. 영지주의의 원래 말이 ‘그노시스’ 즉 알다라는 말에서 왔다. 왜 한글 혹은 한자로 ‘영지’라고 번역됐는지 모르지만 이 번역도 너무 이상하다. ‘영을 알다’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오히려 기독교 핵심 진리처럼 들린다. (그래서 나는 ‘그노시스파’를 ‘영지주의’로 번역된 것이 매우 싫다) 사실 원래의 그노시스파는 말 그대로 ‘모른다’에 기반을 둔다. 그래서 ‘앎’으로 가는 몸부림인데, 재미있게 베드로는 전서와 후서에 ‘알다’ 즉 ‘그노시스’ 혹은 ‘기노스코’라는 말을 많이 쓴다.
‘앎’을 목표로 하는 소위 영지주의에 대항해서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라고 말하지만, 사실 기독교도 ‘앎’을 추구한다. 특히 ‘영’에 대해 많은 기록을 남긴 요한은 요 6:69에서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라고 기록했고, 또 요일 4:16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고 기록하며 ‘믿음’과 ‘앎’은 별개의 것이 아님을 말씀한다. 주님께서도 ‘진리를 알아라! (요 8:32) ’고 말씀하셨고, 동시에 ‘진리’와 ‘믿음’이 함께 가는 구절은 수 없이 많다. 베드로 역시 오늘 말씀에서 ‘이것을 알고 현존하는 진리에 서 있으나’라고 말씀한다.
아무튼 12절의 ‘현존하는 진리’를 말씀하는데, 이 현존하는 진리는 상대적으로 구약의 지나간 ‘첫 언약 (히 9:18)’에 대해 ‘새 언약 (히 12:24)’이며 이것은 또한 ‘영원한 언약 (히 13:20)’이 된다. 주님은 요한 복음 1장에서 말씀한 것 같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시다. 즉 진리는 다른 것이 아닌 주님 자신이시다. 동시에 이 ‘현존하는 진리’는 진리를 흐리게 하는 영지주의 즉 상대적으로 새롭게 판을 치는 사상도 아님을 말하는 것 같다. 오직 현존하는 진리이신 주님 외에는 없다!
이 말씀은 19절에 더 분명해 지는데,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라고 말씀하며 상대적으로 ‘더 확실한 예언이 있’음을 말씀한다. 즉 구약의 예언보다 확실하고 당시 판을 치던 영지주의 보다 더 확실한 예언이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는 구절은 오히려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어둔 곳을 비추는 등불’이 있고 ‘날이 새어 샛별이 마음에 떠오르는’ 등의 말씀은 마치 영지주의자들의 말 같다. 잘은 모르지만 베드로는 이러한 구절을 말씀하며 오히려 영지주의자들을 조롱하고 고소하는 것 아닐까? 그들이 역사적으로 더 오래되고 더 깊다고 떠들고 있지만 오히려 영지주의자들이 쓸만한 이 구절은 구약 성경의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삼하 22:29, 시 119:105, 사 58:10, 말 4:2 등).
20절에는 ‘먼저 알 것은’ 이라고 말씀하며 다시 ‘기노스코’가 나온다. 영지주의자들의 추구가 아니라 제대로 알 것을 알아야 함을 말씀한다. 즉 ‘모든 성경의 예언은 사사로이 풀면 안됨’을 말씀하며, 그 이유가 21절에는 사람의 뜻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한다. 이제 모든 믿는 이들에게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성령의 감동으로 서로가 말씀을 나눌 때 예언은 풀리고 알게 되고 진리는 열린다.
(제 나눔을 읽으시는 분들께 제가 개인적으로 바랬던 것 중의 하나는 그냥 읽으시는 것도 좋고 like누르시는 것도 감사하지만, 혹시라도 저의 나눔이 이상하거나 여러분의 신앙 혹은 신학과 좀 다르다고 생각될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 나누면 좋겠다는 바람이 계속 있었습니다. 물론 큐티를 나누는 것이 신학을 논하는 문제까지 갈 필요는 없고, 또 그 과정에서 논쟁이 생긴다면 좋을 것이 없을지 몰라도 혹시 제가 믿는 것에 문제가 발견된다면 저도 배우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너무 신학적으로 갈 필요는 없고요, 어차피 큐티 나눔이기에…)
주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주님을 힘써 간직하기 원합니다. 주님은 진리이십니다. 주님을 알기 원하고 주의 비밀을 깨닫기 원합니다. 첫 언약 보다 더 나은,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진리를 더 알게 하시고, 주님 외에 다른 것을 추구하게 하는 여러 가지 것들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소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서로 나누며 그 풍성하심을 공유함으로 더욱 풍성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