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는 일부러 ‘데나리온’을 가져오라 하신다. 데나리온은 로마시대 제국 영토에서 유통되던 은전으로 가치는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데, 지난 장에 성전에서 돈바꾸는 자들이 언급된 것 처럼 성전에서는 ‘세겔’이라는 돈만 통용되었고 거기에는 시저의 형상이나 글이 새겨지지 않았다. 당연히 시저에게 내는 세금은 세겔으로는 할 수 없었고 로마의 화폐로만 가능했다.
이 말씀으로 전에는 많이들 국가에 정직하게 납세를 해야 한다는 설교를 하곤 했는데, 주님께서는 그러한 것에 큰 관심이 없으시다. 물론 베드로를 시켜 물고기를 잡아 인두세를 내는 내용은 찾을 수 있지만 ‘형상’과 ‘글’이라고 말씀하신 것에는 그 의미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창조하실 때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창 1:26). 즉 인간은 그 시작부터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아니 아예 그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받은 존재이며 이것은 골 3:10에도 기록되었다.
이 ‘형상 (에이콘)’이라는 말은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에서도 쓰였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존재하기 시작했고, 중간에 타락은 했지만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아 이제는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되는 존재들이다. 동전에 시저의 형상이 새겨진 것 처럼,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새겨진) 글 ἐπιγραφή’의 동사형은 ‘ἐπιγράφω’인데, 히 8:10과 10:16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에도 쓰였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시저 즉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온전히 주님께 속하기 위해 주의 법을 우리 마음에 인치신다. 우리는 주의 소유이며 주께 바쳐지고 주님께서 받으신다.
부활에 관해서 주님께서는 출 3: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를 인용하셨는데, 히브리어에도 그렇지만 헬라어 역시 ‘나’만 있고 ‘이다’ 즉 동사는 없다. 그래서 ‘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으로 기록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아니라 바로 이 죽은 이들을 산 존재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히브리어나 헬라어 혹은 영어는 of 혹은 소유격을 써서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순서 처럼 ‘하나님’ 이 먼저 나온다. 아브라함 등 인물도 중요하지만, ‘나’ 그리고 ‘하나님’이 더 중요하다. 부활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사두개인들은 소위 ‘종교지도자’들 중 한 분파였지만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는’ 이들이었고, 따라서 그들은 심각한 오해와 오류를 범할 수 밖에 없었다. 기독교가 종교가 되어 버리면 각자 자기 소견대로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되고, 이는 사람들은 물론 종교인들 역시 ‘하나님의 형상’을 따르지 않고 ‘짐승의 형상 (계 13:14 등 모두 ‘형상’임)’을 따르도록 전락하게 한다.
흥미로운 것은 27절을 ‘우리말 성경’은 원어에 가깝게 번역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죽은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다’로 되어 있다. ‘죽은 사람들’은 형용사에 소유격이지만, ‘살아있는 사람들’은 동사에 소유격이다. 죽은 이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영적으로 죽었으며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아니시지만, 살아 있는 사람들은 활력있고 하나님께 속한 이들이며 그들은 하나님 처럼 살아 있어서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다.
주님,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께 속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의 형상과 글이 제 안에 더욱 분명히 새겨지고 하나님 처럼 저도 살아있기 원합니다. 우리의 생명 되신 그리스도께서 오늘도 더욱 우리 안으로 역사하여 주소서.
페북 나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는 주의 소유이며 주께서 받으십니다. 우리는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습니다. 아브라함 등 믿음의 선진들도 중요하지만, ‘나’ 즉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시는데 하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죽으셨지만 부활하셨고 지금 살아계십니다. (막 12:1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