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에는 '믿음'과 '마음'이 함께 있는 구절이 24 곳이나 있다. 오늘 23절이 그렇고 특히 롬 10:9-10이 그렇다. 특히 고후 4:13은 '같은 믿음의 마음' 이라는 말은 물론이고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즉 '믿음'과 '말하다'가 함께 간다.
흥미로운 것은 마 21장 역시 같은 내용을 기록하지만 거기에는 마가복음이 이 사건을 이틀에 걸쳐 발생한 것이 아니라 같은 날에 즉시 마른 것으로 기록했다. 과연 어떤 것이 맞는 것일까? 이럴 때 원어를 보는 것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마21:19의 무화과 나무가 '마르다' 동사 시제는 아오리스트이다. '즉시 (파라크레마)'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과거 혹은 완료처럼 들리지만 아오리스트이고, 따라오는 20절 제자들의 질문 역시 아오리스트이다. 그에 비해 오늘 말씀은 완료형이고, 특히 '뿌리로 부터'라는 부언 설명이 있어서 정말 완전히 말라버렸음을 묘사한다. 더우기 질문하는 이는 마태복음의 '제자들'과 달리 베드로 혼자다. 같은 사건일 수도 있고 시간적으로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교훈은 같은데, 따라오는 주님의 말씀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바로 '마음'과 '믿음' 그리고 '말함'과 '기도'의 연관성인데, 특히 마가는 마태와 다르게 '기도'와 '죄 용서'를 함께 언급한다. 즉 '마음'으로 '믿고' 이를 '말함'으로 '얻는'데, 하나님께 구할 때 남의 죄들을 용서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눈여겨 봐야할 것은 22절인데, 원어에는 '하나님의 믿음을 (너희들은) 소유하고 있으라'로 되어 있다. '하나님을 믿으라' 보다는 '하나님의 (소유격) 믿음'이다. 즉 믿음은 우리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그 자체가 선물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그 대상 역시 하나님이시다. 23절의 거의 모든 동사는 아오리스트 시제인데,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이 되고 있다고' 둘만이 현재진행형이고 '되리라'는 미래형이다. 즉 믿음은 미래를 시인함으로 현재로 끌어오는 어떤 것인데,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와 비슷하다. 원어로 가깝게 번역하면 '믿음은 기대되는 것들의 기초요 보여지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 즉 수동태로 되어 있어서 이러한 것들은 그 주체가 우리가 아니라 기대를 주시는 분, 또한 이제까지 숨기셨던 분임을 말해준다. 그래서 역시 '하나님의 믿음'이다.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말하는 것 역시 현재진행형이 아니라 아오리스트에 '가정법'이 적용되어 더욱 이를 뒷받침한다. 산에 대해 우리의 멋대로 바다에 던져지라 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을 가지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으면 그렇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명령'은 '기도'인데 (24절), 특히 서서 (현재진행형 능동태 가정법) 기도할 (현재진행형 이태동사) 때 용서하라 (현재진행형)고 명하신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용서하지 않으실 (미래) 것이다 (26절 사본에 따라).
주님, 믿음은 머리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소유해야 하며 이는 또한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봅니다. 이러한 믿음이 온전히 우리의 것 되기 위해 우리가 시인하며 고백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우리의 기도를 통해 이 땅에 이루어지기 원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용서하셨고, 우리도 남을 용서하기 원합니다. 악을 행하고 있는 자들을 주님께서 불쌍히 여겨 주시기 원합니다.
페북:
신약에는 '믿음'과 '마음'이 함께 있는 구절이 24 곳이나 있는데, 오늘 23절이 그렇고 특히 롬 10:9-10은 물론 특히 고후 4:13은 '같은 믿음의 마음' 이라는 말과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즉 '믿음'과 '마음'과 '말하다'가 함께 갑니다. 우리는 각자 개인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을 소유하고 있'어야 하는데 (22절 원어 참조), 믿음은 우리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그 자체가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그 대상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은 머리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소유해야 하며, 이러한 믿음이 온전히 우리의 것 되기 위해 우리는 시인하며 고백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우리의 기도를 통해 이 땅에 이루어지기 원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용서하셨고, 우리도 남을 용서해야 합니다. 아직도 죄인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악을 행하고 있는 자들을 주님께서 불쌍히 여겨 주시기 원합니다. (막 11:20-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