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의 이혼에 대한 규례는 극히 남성 중심적이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남편이 아내를 버리'는 경우만을 기록하지만 마가복음에는 유독 '아내가 남편을 버리'는 경우도 말씀한다 (12절).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아내가 남편을 버릴 수 있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았을텐데 주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시고, 후에 바울 역시 고전 7장에 두가지 모두 경우를 언급한다. 이것이 바로 율법시대와 새로이 도래한 하나님의 왕국의 차이다. 바울은 고전 11:11에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고 기록한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이혼 증서에 대해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았다고 말씀하시는데, 같은 내용에 대해 마 19:8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하시며 '처음'을 상기시키신다. 그 처음은 바로 창조 원리인 6-9절이다. 6절은 원어로 '창조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다'로 되어 있는데, 여기 '처음'은 요1:1 '태초'와 같은 단어 arche다. 모세의 율법은 분명 존재하며 그 권위도 있지만 그 보다 더욱 '태초' 혹은 '본래'를 볼 줄 알아야 한다.
14절은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라고 시작하는데, '노하다'의 원어는 '아가낙테오'로 '분개하다, 매우 언짢아 하다'를 의미한다. 마 5:22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에서의 '노하다 (오르기조)'와는 조금 다른데, 생각해 보면 주님께서는 요 2:14-16절의 내용에서 화를 냈을거라 생각하지만 정확히 그런 언급은 없는 것으로 보아 이번이 유일하다. 온유하신 주님께서는 (마 11:29) 화를 내지 않으셨지만 제자들이 어린 아이들이 오는 것을 막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불편해 하셨다. 흥미로운 것은 불편한 마음에도 제자들에게 '허락하라'는 명은 아오리스트 시제로 말씀하시고, '막지말라'는 현재 진행형이다.
15절 '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의 '받들다'는 지난 9:37의 '영접하다'와 같은 '데코마이'인데, 동일하게 아오리스트 시제에 이태동사형이다. 요 1:12의 '영접하다 (에도켄)'는 능동태인데 비해 이 단어는 많은 경우 이태동사로 쓰였다. 즉 어린 아이들은 그 스스로의 의지를 사용하는 것만이 아닌, 능동적이면서 동시에 수동적으로 하나님의 왕국을 부담없이 받아들인다. 이러한 어린 아이들의 모습을 갖지 않으면 하나님의 왕국에 결코 들어갈 수 없다.
주님, 그 처음을 다시 보기 원합니다. 주 안에서는, 주님의 왕국 안에서는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음을 봅니다. 분을 내도 온유하셨던 주님의 모습이 저의 모습되기 원합니다.
페북:
유독 마가만 주님께서 '아내가 남편을 버리'는 경우도 말씀하셨음을 기록합니다 (12절). 주 안에서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여 (고전 11:11) 차별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마 19:8에 '본래' 즉 '태초'와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시는데, 율법보다는 태초가 앞섭니다. 14절은 주님께서 유일하게 노하신 사건을 기록하는데, 마음이 언짢으심에도 제자들에게 '허락하라'는 아오리스트 시제로 말씀하시며 주님의 온유하심을 보이십니다. 15절 '받들다'는 지난 9:37의 '영접하다'와 같은 '데코마이'인데, 동일하게 아오리스트 시제에 이태동사형 입니다. 요 1:12의 '영접하다 (에도켄)'는 능동태인데 비해 이 단어는 많은 경우 이태동사로 쓰였습니다. 즉 어린 아이들은 그 스스로의 의지를 사용하는 것만이 아닌, 능동적이면서도 동시에 수동적으로 하나님의 왕국을 부담없이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어린 아이들의 모습을 갖지 않으면 하나님의 왕국에 결코 들어갈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습니다. (막 1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