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주님의 제자들이 먹기 전에 손을 씻지 않는 것을 꼬투리 잡는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무엇을 먹기 전이나 화장실에서 나오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만, 옛날에는 아마도 그러한 문화가 보편적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마가는 유대인들의 청결 의식과 그 문화에 대해 어쩌면 은근히 자랑하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지만, 그 참된 교훈은 외식에 대한 경계이고, 이는 14-16절과 더불어 마15장에 자세히 설명된다.
5절에서 바리새인들은 주님께 현재진행형으로 묻지만, 6절에는 주님께서 아오리스트형으로 답하신다. 우리 말에는 (아마도 주님의 권위를 세우려고) 바리새인들이 주님께 높임말을 하고 주님께서는 하대하는 식으로 번역됐지만, 원어로는 바리새인들이 ‘어찌하여 … 먹는가?’ 정도의 느낌인 반면, 주님께서는 이에 대해 ‘이사야가 당신들 외식하는 자들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소 (혹은 예언하였습니다)’ 정도로 답하신다. 주님의 겸손하심이 느껴진다.
그들의 외식에 대해 특별히 부모 공경에 대한 모세의 계명을 예로 드시는데, 흥미로운 것은 마 5:28에 ‘음행’은 그 나타나는 행동 이전에 ‘마음의 문제’임을 말씀하셨던 것 처럼 10절에도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는 모세의 말씀 그 이전에, 12절은 기본적으로 당연히 부모를 위해 해야 할 것이 있음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아마도 백성들로 부터 오는 많은 예물을 관리하는 이들로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사람들이 부모를 섬기기 위해 물질을 쓰는 대신 자신들에게 가져오면 ‘고르반’이라고 하며 부모들을 위해서는 따로 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아예 ‘허락하지’도 않았음을 볼 수 있다. 그들의 종교는 사람들을 옥죄고 있었다.
이에 대해 중요한 것이 바로 7절인데, 주님께서는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7절)’고 말씀하신다. 원어에는 ‘나를 헛되이 경배하고 있으니 사람의 계명 가르침을 가르치고 있다’ 정도로 되어 있는데, 이 ‘가르침 (헬 디다스칼리아)’이라는 말은 ‘교리’로 많이 번역되었다. 즉 ‘사람의 계명’을 아예 교리로 삼았다는 것인데, 8절은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대신 ‘사람들의 전통’을 지켰다고 폭로하신다. 주객이 전도 되었다.
이렇게 되어버린 이유는 역시 ‘마음의 문제’인데, 마 12:34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고 기록한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 보지 않았고 그들의 떠벌리는 입술에는 분명 하나님의 말씀도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과는 연결되지 않았다. 믿음의 신비 가운데 하나는 마음과 입술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인데, 마음으로만 믿는 것도 부족하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만도 부족하다. 서로가 함께 일을 해야 하는데, 마음으로 믿은 것을 입술로도 시인해야 하는 동시에 (롬 10:10) 마음이 악해질 때는 입술로 고백하며 선포해야 한다 (시 42:5, 11 43:5, 히 13:15).
이럴 때 우리는 주님을 ‘헛되이 경배하’지 않고 참으로 경배할 수 있는데, 이 경배 (헬 세보)’라는 말은 ‘존경하다, 경배하다 (영어로 revere)’는 의미로 개정역에서는 ‘경건한’으로 많이 번역되었다. 신약에 10번 나오며 여러 영번역에서 많이 worship혹은 devout으로 번역된 단어인데, 그러고 보면 ‘예배 (정확히는 경배)’라는 말이 적어도 ‘프로스쿠네오 (무릎꿇어 절하다)’는 ‘라트레이아 (섬기다)’는 물론 이 ‘세보’도 포함된다. 이 단어는 ‘존경, 경외, 경건’ 등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우리는 영 안에서 시작해서 (요 4:24), 마음을 통해, 입술로 고백하며, 또 행함으로 주님을 경배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유혹과 공격을 받아도 이제 주님 앞에 의롭게 됨을 받은 주님의 자녀들로서 우리의 영 안에서 아버지를 경배하며, 마음으로 믿어 입술로 고백하고 선포하며 경배하는 삶을 사는 참된 경배자들이 되게 하소서. 우리 이마에 경배자의 인을 치소서.
페북 나눔: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대신 ‘사람들의 전통’을 지키는 것으로 전락한 이유는 ‘마음’이 원인 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떠벌리는 입술에는 분명 하나님의 말씀도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과는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신비 가운데 하나는 마음과 입술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인데, 마음으로만 믿는 것도 부족하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만도 부족합니다. 마음으로 믿은 것을 입술로도 시인해야 하는 동시에 (롬 10:10) 마음이 악해질 때는 입술로 고백하며 선포해야 합니다 (시 42:5, 11 43:5, 히 13:15). 우리는 영 안에서 시작해서 (요 4:24), 마음을 통해, 입술로 고백하며, 또 행함으로 주님을 경배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막 7:1-13)